배우 유지태가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메가박스점에서 열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기자간담회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뉴스1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 그를 보좌한 대표적인 책사로는 한명회가 꼽힌다. 훗날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한 그는 현대에서는 간신의 대명사로 불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모습도 왜소한 외형에 비상한 두뇌 회전을 뽐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다른 모습의 한명회를 만들어냈다. 일부 기록에서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수려하다”는 한명회에 대한 묘사를 찾아내,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한명회는 배우 유지태의 몫으로 돌아갔다. 2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지태는 “보통은 그런 편견을 깨고, 선입견 없이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는 게 어려운데 감독님이 대단하시다”며 “배우로서도, 감독으로서도 도전이기도 한데 자신감 있게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는 단연 매력적이다. 100㎏ 넘게 증량한 체중과 낮은 목소리, 날카로운 표정이 어우러져 위압감을 뿜어낸다. 첫 촬영 당시 그를 대면해야 했던 단종 역의 배우 박지훈이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고 했을 정도다.

배우 유지태. /쇼박스

유지태는 자신만의 한명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서를 읽고, AI 툴을 활용해 한명회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보기도 했단다. 유지태는 “악역이라고 해서 그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실존 인물이 아닌 영화 속 한명회는 악인으로서 매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 삶을 살아내려는 에너지가 비쳐지면 매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악인이지만 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층위가 무엇일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자신이 갖지 못하는 권력, 왕의 자리를 가장 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상시에 주변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길 바랐을까를 생각해보면, 수양대군 이전에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했을 것 같다. 그래서 왕의 몸짓이나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며 “그런 측면에서 인자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일수록 더 무서워지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악역으로 잘 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며 “중심 역할을 해줘야 단종과 엄흥도(유해진)의 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그 부분이 잘 살아야 두 사람이 빛날 수 있고, 애틋해진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작품 자체가 워낙 휴머니티가 강하다. 다들 행복한데 나 홀로 고립된 케이스”라며 “그런데 사실 이런 영화를 좀 많이 했다. 그래서 또 다른 색깔의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장에서도 그 에너지를 유지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휩쓸리면 안 됐다. 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고 덧붙였다.

배우 유지태. /쇼박스

영화 속 대부분 장면이 강원도 영월에서 진행되지만, 한명회는 한양에 머무르거나 홀로 나오는 장면이 많다. 다른 배우들과 동떨어져 있는 시간들이 외롭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유지태는 “이런 감정에 익숙해서 그러려니 했다. 거꾸로 감독님이 ‘외롭지 않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 답했다.

유지태는 “일부러라도 좀 외로워야 되는 게 배우의 직업 특성이기도 하다. 그런 건 배우의 숙명일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어 “사람들과 마구 즐기면서 이런 역할을 하고, 밀도감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래서 현장에서도 집중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배우로서의 책임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지태는 “저는 필름세대다. 그래서 ‘쇼트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던 배우”라며 “아주 작은 디테일한 감정도 놓치지 않으려고 혼자 고립을 좀 시키는 게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순간에서 나오는 스파크, ‘매직 모먼트’를 담으려고 감독도 스태프도 배우도 다들 집중하고 몰입했던 그 시기에 연기를 했던 배우라 그게 저에게 익숙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뤘다. 박지훈이 단종 이홍위를, 유해진이 단종의 유배 생활을 감시하는 엄흥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이 밖에도 유지태, 김민, 이준혁, 박지환 등이 출연했다. 다음 달 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