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침전에서 눈을 뜬 순간, 거울 속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 회사에서 야근하던 사람이 조선 궁궐 한복판에 떨어진다. 문틈 사이로 부적이 흔들리고,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신분제 세상이 펼쳐진다. 과거로 떠밀려 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21세기 입헌군주제 국가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시청자는 “이게 사극이야 판타지야” 헷갈리면서도 다음 화 버튼을 누른다. 조선이라는 옛 무대를 배경으로 타임슬립·빙의·주술 같은 장르적 쾌감을 얹은 ‘퓨전 사극’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궁중물’이 최근 TV 드라마 흥행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MBC는 디즈니+와 함께 4월부터 아이유·변우석 주연 ‘21세기 대군부인’을 방송한다. 21세기 입헌군주제 대한민국이라는 가상의 배경에서 벌어지는 궁중 로맨스. 디즈니+는 여기에 더해 가상의 나라 동대제국을 배경으로 한 ‘재혼 황후’, 1935년 경성의 매혹적인 뱀파이어 이야기를 그린 ‘현혹’ 등 판타지 사극 카드를 준비하며 트렌드를 정조준했다. 지난 3일부터 방영 중인 남지현·문상민 주연 KBS 토일 드라마 ‘은애하는 도적님아’ 역시 두 남녀 주인공의 혼이 서로 바뀌는 설정으로 퓨전 사극의 계보를 잇고 있다.
조선시대 이야기지만, 해외에서 오히려 더 인기가 있다. 과거 방송사들은 한복과 궁중 예법, 낯선 시대 배경이 해외 시청자에게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엔 조선시대라는 배경 자체가 강력한 볼거리가 됐다. 여기에 최근 우리나라 사극들이 택한 전략은 ‘역사 공부’가 아니라 ‘장르 쾌감’이다. 궁궐은 권력의 위계와 금기가 극단적으로 정리된 공간이라 로맨스·스릴러·미스터리를 붙이기 좋고, 타임슬립이나 영혼 체인지가 더해지면 갈등의 속도와 감정선이 즉각 살아난다는 것. 특히 무속·빙의 같은 한국형 오컬트는 서구권의 엑소시즘 서사와 닮아 있으면서도 결이 달라 신선함을 준다.
흥행 경험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지난해 tvN ‘폭군의 셰프’는 현대의 셰프가 시간 여행을 통해 조선 시대에 가는 내용으로,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2주 연속 글로벌 1위를 기록했다. SBS ‘귀궁’은 조선 시대에 한국 전통 귀신이 나오는 오컬트를 접목해 가장 큰 아시아 콘텐츠 플랫폼인 라쿠텐 비키에서 89개국 1위를 차지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K드라마를 통해 한국적 미장센과 전통문화에 익숙해진 해외 시청자들은 사극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며 “현대적 감정선과 판타지를 결합하면 국가·문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보편성이 생겨 글로벌 경쟁력이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