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중년 남성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재벌 2세도 아니고, 외모·학벌 다 갖춘 완벽남도 아닌 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퇴직을 앞뒀거나 이미 회사 밖으로 밀려난 중년 남성이 대부분. 청춘의 빛나는 아름다움만을 비추던 TV 카메라가 중년 남성을 비추는 것 자체가 큰 변화다.
SBS가 2026년 새 금토 드라마로 선보일 소지섭·최대훈·윤경호 주연의 네이버웹툰 원작 ‘김부장’에는 한 중소저축은행에 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 김부장은 과거 남북을 오가며 수차례 특수 작전에 투입됐던 공작원이었지만, 이를 숨긴 채 살고 있다. 어느듯 세월이 흘러 회사에서 잘릴 위기에 처했고 가정에서도 ‘잔소리꾼’ 취급 받으며 권위를 위협받는다. 이런 찌질한 아버지가 딸이 위기에 처하면서 숨겨 있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스토리. 웹툰 원작은 “회사와 가정에서 동시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중년 남성들의 대리만족을 자극한다” “사회와 가정에서 역할을 잃어가는 세대의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건드린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사회와 가정에서 역할을 잃어가는 세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는 25년 근속한 회사에서 쫓겨난 김낙수씨 이야기다. 드라마는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이라는, 한국 중년 남성들이 추구해온 삶의 기준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주인공은 ‘김 부장’이란 호칭을 내려놓고 ‘김낙수’라는 개인으로 돌아간다. 이는 최근 중년 남성 서사가 공통적으로 도착하는 종착지. 평론가들은 “개인의 실패담이 아니라, 회사와 스펙에 의존해 정체성을 유지해온 중년 남성 모델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분석한다.
사실 이런 흐름은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일찌감치 예고됐다. 은행 부행장, 연구소 소장, 영화감독이었지만 삶의 아래쪽으로 밀려난 인물들은 술집에 모여 하루를 견디고, 회사에 남아 버티던 인물들 역시 떠난 뒤에야 비로소 편안함에 도달한다. 과거에는 배경이자 주변부 이야기로 소비되던 이 ‘아저씨들 서사’가 하나의 흐름으로 읽힌다는 것.
지난 9월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는 25년간 제지 회사에서 전문가로 살아온 중년 남성이 외국계 자본의 인수 이후 하루아침에 해고되며 벌어지는 일을 블랙 코미디로 풀어냈다. 전원주택과 안정된 가족을 갖춘 ‘완벽한 삶’은 해고 통보 한 번에 무너지고, 불안은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언제든 교체 가능한 노동 구조의 문제로 제시된다.
◇유튜브 인기 캐릭터가 된 중년 남성들
유튜브는 이 균열을 가장 직접적으로 포착해 왔다. 55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닛몰캐쉬’는 일본어 ‘오지상(おじさん)’과 콤플렉스의 합성어인 ‘오지콤’ 콘셉트로 중년 남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화제를 모았다. 61만 구독자의 개그맨 김해준은 ‘50대 낭만 부부’를 통해 고집불통 중년 남성의 일상을 보여주고, 김대희의 유튜브 채널 ‘꼰대희’는 젊은 아이돌과 인플루언서를 초대해 세대 간 불통을 코믹하게 드러낸다. 이 콘텐츠들의 공통점은 중년 남성을 미화하지도, 희화화하지도 않는다는 것. 퇴직과 생계, 노화와 관계의 균열 같은 불편한 현실을 숨기지 않으면서, 회사와 역할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한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가치를 추구하는 마지막 세대”
왜 지금 중년 남성 서사일까. 그 배경에는 중년 남성이 오랫동안 의지해 온 역할 모델의 붕괴가 있다. 평생직장, 가장 중심의 가족 구조, 연공 서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체성은 아직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중년 남성 콘텐츠의 증가는 우연이 아니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인 이른바 ‘마처세대’가 본격적으로 사회의 중심에 진입했기 때문”이라며 “이는 우리 사회가 최근 마주하게 된 질문이자, 이들의 역할 모델이 이제 바뀌고 있다는 흐름의 반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