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합니다. 내가 백아진이라면 과연 선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난달 28일 서면으로 만난 티빙(TVING) 드라마 ‘친애하는 X’의 원작자 반지운 작가는 주인공 백아진이 지나온 길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화려한 스타 시스템 뒤에 숨어 있던 폭력, 버려진 아이, 통제되지 않는 부모 권력, 업계의 잔혹한 생리까지. 그는 작품을 쓰다 어느 순간 “이 인물이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 자체가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다”는 생각에 멈칫했고, 결국 “나라도 과연 선하게 버틸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친애하는 X’는 지난달 6일 티빙에서 동명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배우 김유정·김영대가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공개 직후부터 3주 연속 티빙 주말 유료 가입 기여자 수 1위를 기록하며 뜨겁게 반응했다. 글로벌 반응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22일 기준 미국 OTT 비키와 일본 디즈니+에서 TV쇼 인기 1위에 올랐고, HBO 맥스에서도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7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최정상 여배우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백아진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천사의 얼굴 아래 숨은 악마’를 정교하게 시각화한 연출은 “‘한국형 피카레스크’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평가를 끌어냈다.
반 작가가 이번 작품을 통해 던진 질문은 분명하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그는 “괴물은 만들어진다”고 단언했다. 사회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과 배려를 제공하지 못할 때, 생존을 위해 감정과 양심을 버리는 선택이 반복될 때, 결국 ‘백아진 같은 존재’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쌓여온 혐오, 고립, 아동학대처럼 “시스템이 너무 헐겁다”고 느꼈던 현실의 결도 작품 아래에 깔려 있다.
반 작가가 설계한 백아진은 단순한 악녀가 아니다. 그는 “흥미를 위한 악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악을 택한 인물”이라 설명했다. 최소한의 감정은 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과 양심을 하나씩 버려야 했던 존재라는 뜻. 드라마는 이 입체성을 더욱 확장했다. 반 작가는 “8화의 ‘할머니 에피소드’처럼 원작에 없던 짧은 인간적 순간들이 악의 화학식 속에서도 잠시 드러나는 인간성을 보여주며 새로운 해석을 열었다”고 했다.
드라마 ‘친애하는 X’의 이응복 감독과의 협업은 작품의 전체 톤을 결정지은 지점이었다. 반 작가는 “같은 탐미주의자로서 감독의 미장센과 디테일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원작에도 없던 ‘백선규의 존댓말 장면’처럼 사회적·심리적 코드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디테일이 영상화를 통해 추가되며 캐릭터의 결이 한층 풍부해졌다는 설명이다. “특히 2화에서 보면, ‘백선규’가 ‘황지선’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존댓말을 씁니다. 그의 캐릭터성, 속된 말로 ‘제비’ 같은 면을 자연스레 보여주기 위해 손님 대하는 호스트처럼 존댓말을 쓰는 디테일이 추가된 거죠. 굉장히 세련된 디테일이라고 생각해서 감탄했습니다.”
캐스팅에 대한 만족도도 컸다. 반 작가는 “김유정을 캐스팅한다는 소식을 듣고 베개를 때릴 정도로 기뻤다”고 했다.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라는 백아진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며 “촬영본을 처음 봤을 때, 제 머릿속에만 있던 백아진이 현실로 걸어나온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연재 당시와 지금의 독자 반응도 달라졌다. 초창기에는 ‘여성 소시오패스’라는 자극적 코드에 집중하는 시선이 많았다면, 지금은 오히려 “왜 이런 괴물이 만들어졌는가”를 묻는 독자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학생이던 독자들이 지금은 사회인이 되어 ‘이제야 이해된다’고 제게 말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