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준호 / 사진제공=O3 Collective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혹독한 시기는 가끔, 기억 속에 지독하게도 아름답게 각색돼 자리하기도 한다.

1997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외환위기.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누군가는 세상과의 작별을 선택하고, 절망만 가득할 것 같은 시절 속에도 ‘사람’과 ‘희망’을 놓지 않았던 종합상사맨들의 치열한 생존기, 드라마 ‘태풍상사’가 지난달 30일 10.3%(닐슨 전국 기준)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중심에는 무모하리만치 솔직하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남자, ‘강태풍’ 역의 이준호가 있었다.

‘태풍상사’의 강태풍은 하루아침에 부친을 잃고, 무역회사의 사장이 되어버린 역할. 그 시절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다는 요즘,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은 그냥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이 제대로 겪어 내지 않았던 시대의 소용돌이 한복판의 주인공이 되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이준호는 극적인 효과 속에 판타지로 버무려져 버릴 뻔한 드라마에 현실성을 불어넣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이준호

최근 만난 이준호는 강태풍 역할에서 여러 면에서 자신을 돌아보려 애쓴 것 같다. “올 한 해 태풍이로 지내면서 저와 닮은 지점을 많이 찾으면서 감회가 새로웠어요. 그 덕에 몰입하기 좋았던 것 같습니다. 새롭게 출발한 일뿐만 아니라, 가족과 부모님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기였어요.” 이준호는 앞서 17년간 함께한 JYP엔터테인먼트과 이별 뒤 1인 소속사 O3 Collective(오쓰리콜렉티브)를 설립하고 독립했다. 물론 이전 2PM 멤버들과는 여전히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

“태풍이를 연기하면서 이런 모습이 20대 때 제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태풍이는 굉장히 솔직하고 감정 표현에도 숨김이 없고, 뭔가를 해내는 추진력에도 거침이 없거든요.”

그는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저는 어렸을 때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나한테 뭔가 아쉽거나 부족한 게 있으면 참을 수가 없어서 계속 채찍질을 했던 성격이었죠. 물론 그때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됐겠지만, 태풍이를 연기하면서는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그 인물이 가진 성격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숨김이 없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 캐릭터였죠.”

배우 이준호 / 사진제공=O3 Collective

준비 기간부터 촬영까지 꼬박 1년 4개월이 걸렸다. 보통 작품이 끝나면 떠나보내는 게 순리인데, 이번 작품은 유난히 애정이 깊어 쉽게 보내지지가 않는다. 강태풍이라는 인물이 가진 추진력과 솔직함, 에너지가 연기를 하는 동안 그 자신에게 큰 힘이 된 이유도 있다.

이준호는 “(가수) 2PM 활동 때부터 지금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저의 유일한 무기였다”면서 “강태풍 역시 태풍상사를 살리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치는 인물이고, 그 처절함과 열정이 저의 지난 시간들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고 강조했다. 16부작이라는 긴 호흡 안에서 인물의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릴 수 있어 행복했다고 덧붙이면서.

그는 “엔딩에서 태풍이가 성공하여 트럭 앞에 서 있는 장면은 저에게도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줬다”면서 “시청자분들에게도 강태풍이 ‘지치지 않는 희망’의 상징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웃었다.

드라마 '태풍상사'에서 강태풍 역을 맡은 배우 이준호. /tvN

그는 이 드라마에서 온전히 강태풍이었다. 내면은 물론 외면도 강태풍 그 자체였다. 의상은 물론 머리카락 한 올까지 그 당시를 재현했다. 흔히 말하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X세대의 이미지를 연구하려 다양한 영상물과 과거 자료를 참고했다. 그룹 쿨의 이재훈, 드라마 ‘미스터 큐’의 김민종 등 당시 스타들의 헤어스타일을 참고했고, 서울 사투리, 오렌지족 문화, 리복 CF 패러디까지 세밀한 디테일에 공을 들였다.

보통 드라마 촬영이 장면 순서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브리지(일부만 탈색하는 것)의 경우 실제 염색은 어려워 염색된 피스(이미 돼 있는 부분)를 붙여 연출했다. 의상은 상당수 직접 제작했다. 특히 보라색 가죽 코트나 엔딩에 입은 검은색 레자(인조 가죽) 코트 등은 시중에 구할 수가 없어서 직접 제작했다고 밝혔다. 이준호는 “(가수이자 과거 소속사 대표인) 박진영의 과거 인터뷰, 압구정 문화를 담은 다큐멘터리 등을 많이 찾아봤다”며 철저한 준비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드라마의 미덕은 결국 함께 살아가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조금씩 이야기했다. “그 당시가 제가 초등학생 시절이었는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저는 누나와 있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앞집 아줌마’, ‘윗집 아줌마’ 하며 이웃끼리 서로 아이들을 봐주고 챙겨주던 시절이었습니다.”

배우 이준호 / 사진제공=O3 Collective

이준호는 “우리 드라마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라면서 “금 모으기 운동처럼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던 그 시절, 태풍이가 동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요즘 같은 시대에 필요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 김민하와의 호흡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서, 태풍이가 무모하게 돌진할 때 묵묵히 곁을 지켜주고 지지해 주는 미선의 존재가 있었기에 태풍이가 성장할 수 있었다. 이준호는 “태풍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은 사람을 생각하는 사랑”이라며 “힘든 상황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배우 이준호 / 사진제공=O3 Collective
배우 이준호. /O3 Collective

‘시즌 2’에 대한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준호는 “만약 시즌 2가 만들어진다면 2000년대 초반, 벤처 붐이 일던 시기를 배경으로 태풍이가 또 어떤 도전을 해나갈지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태풍이를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마음은 저도 같다”고 웃었다.

2008년 그룹 2PM으로 데뷔해 배우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룬 이준호는 “연기가 좋아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한 캐릭터를 창조해서 그 삶을 살아본다는 게 값진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준호는 곧 공개될 넷플릭스 ‘캐셔로(Cashero)’에서 또 다른 모습을 선보일 예정이다. “내 돈으로 세상을 구해야 하는 이야기”라며 “시원시원하지만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히어로물”이라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