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어느 날 꿨던 꿈이 있어요. 그 이야기에 역사를 입힌 게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라면, 이번 새 작품은 그 꿈의 원형에 훨씬 가까워요.”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 작가 신일숙(63)이 지난 8월부터 네이버웹툰에 신작 ‘마누의 딸들’을 연재하며 8년 만에 활동을 재개했다. 작품은 신과 인간을 잇는 여왕 ‘마누’와 짐승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닌 네 딸의 이야기. 여성 중심 마누 왕국이 남성 왕권 중심의 외세와 부딪히며 벌어지는 운명의 서사다.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신일숙 작가가 ‘마누의 딸들’(왼쪽)과 ‘아르미안의 네 딸들’ 표지를 보여주며 웃고 있다. /박성원 기자

지난 3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신 작가는 “마누는 여왕이자 신관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고, 딸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선다”며 “여성들이 외부의 충돌 속에서 자기 세계를 세워가는 이야기”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여성의 원형과 리더십을 다시 탐구했다”고 했다.

“꿈을 자주 꾸고 그중 30%는 작품으로 발전해요. 심지어 꿈속 대사를 그대로 옮기기도 합니다.” 그는 10대 시절 그리스·로마 신화를 접한 경험이 여성 중심 서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리스 신화 속 여신들은 신비롭고도 정치적이었어요. 그때 처음 여성이 세계를 통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86년부터 출간해 만화 대본소를 휩쓸었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이어 유명 만화 잡지에 연재했던 ‘리니지’는 동명의 온라인 게임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게임 속 ‘혈맹을 모아 왕국의 군주 자리를 탈환한다’는 주요 설정이 원작에서 유래했다. 역사와 신화, SF를 넘나드는 그의 서사가 게임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제 웹툰 플랫폼으로 옮겨온 그는 콘티부터 펜 터치까지 전 과정을 디지털로 진행한다. “레이어를 나눠 수정할 수 있어 편하지만, 모니터 빛 때문에 눈이 많이 피로합니다.” 트렌드를 좇기보다 “10년, 20년 뒤에도 감동을 줄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속도보다 밀도를 택했다”고 말했다.

2019년부터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맡아 창작자 권익 향상에도 힘써왔다. 지난 10일 공식 출범한 문체부 장관 직속 기구인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의 위원으로도 위촉됐다. 그는 “작가들이 건강하게 오래 일하려면 1년에 몇 차례는 휴재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연재와 협회 업무로 숨 돌릴 틈이 없지만,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 앞에 앉는 이유는 하나다. “그림이 의도대로 나올 때의 희열이 모든 고통을 견디게 해줘요.”

그는 “20대엔 쉰 살이면 그만두겠지 했는데 아직도 그리고 있다”며 웃었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평생 현역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건강하게 새 작품을 시작한 것 자체가 선물이라 생각해요. 여성의 세계가 강했던 시대가 분명 있었고, 여왕들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마누의 딸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