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배우 이순재(91)는 언제나 자신을 먼저 내어 주는 사람이었다. 모자라니 더 배워야 하고, 더 베풀어야하고, 언제나 준비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 앞에는 시청자가, 관객이, 또 국민이 있었다. 지난해 말 KBS 연기대상에서 ‘개소리’로 대상을 받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진채 이 이야기를 할 때, 보는 이들도 함께 울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해 70년 가까이 무대를 누빈 ‘연기 장인’에게 주어진 생애 ‘첫’ 연기 대상. 그의 이력을 보면 너무나도 뒤늦은 수상인 듯 했지만 이순재는 “아름다운 상”이라며 “60대가 넘어서도 연기로 평가받게 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자신의 영광을 곱씹는게 아니라, 드라마 촬영으로 수업에 미진했을까 염려돼 학생들에게 미안했다며, 지금까지 연기할 수 있게 해준 시청자 모두에게 “신세를 졌다”고 했다.
‘대발이 아빠’(사랑이 뭐길래) ‘야동 순재’(거침없이 하이킥) ‘꽃할배’(꽃보다 할배)…. 어떤 역할이든 가리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했던 ‘영원한 현역’ 이순재가 25일 새벽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다. 병환으로 재활을 하던 중 병세가 악화됐다.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다.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고, 완성을 향해 끊임 없이 도전한다”며 연기에 대한 끈을 쉬이 놓지 않았던 그는 이미 ‘이순재’라는 ‘연기 장르’를 완성한 예술인이었다. 빈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아내 최희정씨와 아들 이종혁씨, 딸 이정은씨가 상주로 이름을 올렸다.
◇피를 흘려도 무대는 계속된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네 살 때 할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한학자였던 조부는 보수적이었지만, 주위를 돌봐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서울고 재학시절 6·25전쟁을 겪었다. 그 당시 처참했던 전쟁의 흔적과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이순재가 이후 각종 봉사활동에 나서며 아이들에게 베풀어야 겠다는 다짐을 만든다.
1954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영화’라는 신세계에 빠져들었다. 로런스 올리비에의 ‘햄릿’을 봤을 때다. 연기에서 ‘예술’을 발견했다. 프랑스 연출가 장-루이 바로(Jean-Louis Barrault)의 작품을 죄다 찾아봤다. 그와 과거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읊었다. “(줄리앙) 뒤비비에, (루카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같은 대가들의 작품, 좋은 배우들도 많지. 소피아 로렌, 실바나 망가노, 줄리에타 마시나 이런 옛날 작품들은 안 본게 없어. 또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 유전’은 꼭 봐야 해. 대사가 시(詩)야. 근데 그 중에서도 로런스 올리비에 작품을 보는 데 소름이 쫙 끼치는 거야. 정말 예술이다, 싶었지. 그땐 ‘딴따라’ 시절이야. 예술적 행위를 인정해 주지 않았어. 그래도 하고 싶은 거야.”
그는 대학 졸업뒤 당시 한국 현대연극의 중심이었던 극단 신협(新協)을 이끌던 이해랑(1916~1989) 선생을 찾아갔다고 했다. 연기를 배우고 싶고, 또 자주 보이면 말단이라도 뽑힐까봐서였다. 이해랑 선생이 운영했던 ‘동방싸롱’은 당대 유명 연극인, 영화인의 아지트였다. 유치진(극작가·연출가) 이진순(연출가) 선생에 박인환, 김수영 같은 시인들도 드나들었다.
해체되다시피 한 서울대 연극회를 극작가 김의경 등과 재건했던 그는 1960년 서울대·연세대·고려대 극회 중심으로 실험극장을 창립했다. 멤버는 김의경·허규·이기하·김성옥·김동훈·이낙훈·오현경·여운계 등이었다. 이순재는 이를 “소극장 운동의 시작”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연극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직업으로 택했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무대에 오른 뒤 ‘예술가’면서도 ‘직업인’으로 나섰다. 꾀부리는 것 없이 누구보다 성실했다. 지난 2012년에 연극 ‘아버지’ 공연 당시엔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중 무대 장치에 부딪쳐 눈 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공연을 중단할 수 없다는 의지로 피를 닦아내며 공연을 끝까지 마쳤다. 배우라면 무대에 선 이상 죽기 전까지는 연기를 해야한다는 평소 지론이었다.
“쓰러지기 전까지 평생 연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그는 지난해 건강 악화로 공연을 취소하기 전까지 무대에 섰다. “(노화로) 암기를 못해 NG를 수십번 내서 문제가 되는 때가 은퇴 시기”라며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었던 그에겐 ‘은퇴’란 단어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각, 특별대우, 잘못된 발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연기를 사랑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로망과 현실의 격차는 컸다. 각오는 했지만 정말 배가 고팠다. 그가 연극을 한 뒤 처음으로 ‘출연료’를 받은 게 1978년 ‘세일즈맨의 죽음’ 때다. 방송은 ‘생활’을 위해 시작했다. 1964년 TBC 개국 공채 1기 탤런트로 입사했다. MBC에선 최불암, KBS에선 신구가 이름을 날릴 때였다. 이후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강제 흡수된 뒤 KBS로 적을 옮긴 뒤엔 도통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대하드라마 ‘풍운’(1982)의 대원군역 제의가 들어왔어요. 아직 KBS에선 날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왕 역할이다 보니 위엄있게 연설도 해야 했고, 그 당시 담배를 끊었어요. 한번 마음을 먹으니 두 번 다시 피우지 않게 되더군요.”
드라마 역할과 비중을 두고 봤을 때 ‘풍운’으로 큰 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내심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빈손이었다. 그는 당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이었지. 근데 상을 안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최선을 다한 과정이 있는데. 배우의 연기와 연출의 영상은 시청자와 관객 앞에서 절대 사기 칠 수 없는 분야야. 시청자도 다 알거든. 대신 담배를 끊어 건강할 수 있었어.”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만큼 후배 연출가나 배우들에게 쓴소리에도 거침없었다. 1970~1980년대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후배 양성과 방송 환경 개선에 힘을 쏟았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건 똑같았다. “지각, 특별대우, 잘못된 발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세 가지다.” 실상 업에 대한 ‘기본’이었다. 그 스스로도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당시 발음과 발성이 중요하다 생각해 사전을 펴 놓고 발음부터 다시 배워나갔다고 했다.
연습실에 가장 먼저 나와있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15년 전부터 ‘쪽대본’ 날림 제작 현실을 비판하며, ‘사전 제작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요즘에서야 정착된 방송 제작 환경이다. 열악한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 높였어도,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리 격한 감정이 들어도 ‘이 자식’이란 험한 소리 한번 입에 담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엄격했지만, 끌어안았다. 연기 의지가 있는 후배들은 누구든 마다하지 않고 그의 시간을 내어주며 밤이든 새벽이든 언제든 연기를 가르쳤다. 여러 대학에서 제자를 키웠고,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연기자를 양성했다.
◇거침없이 쓴소리하는 우리 시대 따뜻한 아버지
바른 말이 힘을 얻으려면 스스로 제대로 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대본을 존중했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청률 59.1%를 기록하며 전국적인 사랑을 받은 ‘사랑이 뭐길래’(1991)의 ‘대발이 아버지’에서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상을 표현했다면 ‘거침 없이 하이킥’(2006)에선 봉타고 올라가고. 야동 보며 킥킥 대고, 말 안 듣는 아들에게 ‘하이킥’을 날리는 등 근엄하고 권위적인 척 하지만 실상은 철딱서니 없는 이들의 민낯을 ‘거침없이’ 그렸다.
가부장적이었다가 한 없이 공처가가 되는 등 ‘대한민국 보통의 아버지’라 불렸던 그의 연기는 실제의 그의 삶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그가 살면서 가장 미안해 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전국민이 알아보는 ‘국민 아버지’ ‘국민 할배’였지만, 일을 우선하다보니 가정에 충실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연기하느라 두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 아내와 함께 하지 못했다. 연기하느라 밤샘은 일쑤였고, 연기하느라 생활에 쪼들리기 다반사였다. 그는 “모든 것을 감내해주고 곁에 있어준 게 내게 너무나도 큰 상”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좀처럼 쉬는 법이 없었다. ‘상도’, ‘장희빈’, ‘불멸의 이순신’, ‘이산’ 등 사극을 비롯해 ‘흥부네 박터졌네’ 등 현대극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작품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했다. 노년에도 ‘세일즈맨의 죽음’ ‘늙은 부부 이야기’ ‘장수상회’ ‘앙리할아버지와 나’ ‘리어왕’ 등 연극에 출연하며 ‘대학로의 방탄노년단’으로 불렸다.
짧게 정치에도 몸담았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예술인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새로운 경로를 열었다. 특히 문화·외교 분야 의정 활동에 주력했다. 1998년 중랑문화원 초대 원장으로 문화 복지에 힘쓰는 등 각종 사회복지 봉사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정치라는 게 대중속에 파고들어야 돼요. 정치인이 해야 하는 제1 원칙이 뭐에요. 국가의 번영과 국민 복리 증진 아닙니까? 권력을 왜 자기들이 잡으려고 해요. 국민을 끌어안을 수 있는 리더십이 중요한 거지요.”
지난해 인생 첫 ‘연기 대상’이자 방송 3사 사상 최고령 ‘대상’을 받은 그가 KBS에서 처음 출연했던 드라마 제목은 ‘나도 인간이 되련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이순재는 그의 평생을 바쳐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1934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
▲1954년 서울대 철학과 입학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 데뷔
▲1961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KBS)로 공중파 데뷔
▲1971년 초대, 72년 2대, 78년 12대 한국방송연기자 협회장
▲1982년 제9회 한국방송대상 TV 연기상(KBS 드라마 ‘풍운’)
▲1991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주연(시청률 59.1%)
▲1992년 14대 국회의원 당선(민주자유당 중랑 갑)
▲1996년 KBS 연기대상 공로상(1995년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등)
▲1998년 세종대 석좌교수
▲2000년 MBC 연기대상 연기자 부문 특별상(드라마 ‘허준’)
▲2000년 SBS 연기대상 공로상
▲2002년 MBC 명예의 전당
▲2002년 문체부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대상(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2009년 제45회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2009년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2011년 중국 금계백화장영화제 남우주연상(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2011년~ 가천대 석좌교수
▲2016~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인복지 홍보대사
▲2017년 제27회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2018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2022년~ 서울연극협회 서울연극협회 홍보대사
▲2024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꿈의 극단 홍보대사
▲2024 KBS 연기대상 대상(드라마 ‘개소리’)
▲2025년 제37회 한국PD대상 탤런트부문 출연자상(드라마 ‘개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