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가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서 열린 '쿠첸 123 밥솥 론칭 기념 미디어데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뉴스1

‘피겨 여왕’ 김연아가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밥솥 엘리베이터를 타고 123층에 오른다. 그곳에서 김연아는 123℃에서 완성된 잡곡밥 맛을 즐긴다.

주방 가전 기업 쿠첸의 전속 모델 김연아가 출연한 ‘123 밥솥’ 광고 장면이다. 이 광고는 11일 기준 유튜버 누적 조회 수 370만회 이상을 달성하며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06-07 시즌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피겨 여왕’에 등극한 김연아는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후 다수의 광고를 찍었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현재에도 한국기업평판연구소가 실시한 광고 모델 브랜드 평판에서 30위 안에 들며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런 김연아가 밥솥 업계에서 점유율 2위의 후발 주자 쿠첸의 모델을 맡은 데는 ‘삼성맨’ 박재순 쿠첸 대표와의 각별한 인연이 배경이 됐다.

2009년 삼성전자에서 국내 마케팅을 책임지는 한국총괄장이었던 박 대표는 김연아를 모델로 한 ‘하우젠 에어컨’ ‘연아의 햅틱’ 등 굵직한 캠페인을 전개했고, 두 사람은 함께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갔다.

김연아가 "씽씽 불어라"라는 가사의 CM송을 직접 불러 화제가 된 삼성 하우젠 에어컨 광고. /유튜브

2009년 첫선을 보인 하우젠 에어컨 광고는 김연아가 직접 ‘씽씽’ CM송을 부르며 시작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때 에어컨 마케팅 부서에서는 피겨 동작을 활용한 현장 판촉물을 기획·제작해 오프라인에서도 홍보를 이어가며 캠페인 성공에 박차를 가했다.

이듬해에는 완벽한 점프, 무결점 연기 등 김연아의 압도적 기량을 반영한 ‘제로’ 에어컨 광고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제일기획 광고 효과 조사 자료에 따르면 김연아가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전체 광고 선호도 중 ‘삼성 하우젠 에어컨’이 40.5%로 1위를 차지할 만큼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연아의 햅틱'을 들고있는 김연아 선수./조선일보DB

같은 시기 김연아는 삼성전자 애니콜 모델로도 활약했다. 에어컨에 이어 휴대전화까지 삼성전자 두 품목의 모델을 맡는 것은 당시에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 대표가 김연아를 모델로 내세우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결과라는 후문이다.

‘연아의 햅틱’은 2009년 국내 최단기간 100만대 판매를 돌파하는 등 휴대전화 시장에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키며 당시 애플 아이폰과의 시장 쟁탈전에서 고전하던 삼성전자의 매출을 견인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대로 진입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대표와 김연아의 신뢰 관계는 경기 현장으로도 이어졌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당시 한국 판매 책임자로 현장에 참석해 김연아의 역사적인 금메달 획득 순간을 함께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때에는 중국 영업 책임자로 김연아의 경기를 직접 보며 응원했다.

삼성전자가 후원한 ‘삼성 애니콜 하우젠 2010 올댓 스케이트 서머 아이스쇼’ 포스터. /삼성전자

특히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후에는 김연아를 비롯한 세계 정상급 선수가 참여한 아이스쇼를 후원했다. 국내 팬들이 피겨스케이팅의 우아함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도록 피겨의 대중화에 앞장섰고, 김연아도 이 점을 고마워했다고 한다.

2019년 삼성전자를 떠난 박 대표는 이듬해 쿠첸 대표이사로 취임한 후에도 김연아와 인연을 이어갔다. 2022년 김연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쿠첸 ‘트리플 밥솥’에 김연아 부부의 이니셜 각인을 새긴 스페셜 에디션을 제작해 직접 전달했다. 박 대표와 김연아가 긴 세월 쌓아온 깊은 신뢰를 확인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2023년 쿠첸의 모델로 처음 등장한 김연아의 '브레인 밥솥' 광고. /유튜브 쿠첸CUCHEN

이런 인연이 김연아가 쿠첸 모델이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결혼 이후 김연아에게는 다양한 주방가전 제품의 모델 제안이 잇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김연아는 오랜 신뢰 관계인 박 대표가 쿠첸의 대표이사임을 떠올렸고, 쿠첸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른 주방가전 브랜드 모델이 되는 것보다는 쿠첸과 함께하는 것이 그동안의 인연을 지키고 의미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박 대표는 경영 여건이 회복되지 않아 김연아 같은 정상급 모델을 기용할 계획이 없었지만, 김연아 측의 제안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협업을 수락했다. 이에 당초 계획을 전면 수정해 김연아를 2023년 ‘브레인 밥솥’의 신규 모델로 발탁했고, 11년 만에 다시 함께하는 훈훈한 모습이 재연됐다.

지난 8월 열린 '123 밥솥' 론칭 기자간담회에 박재순(오른쪽)쿠첸 대표와 모델 김연아(왼쪽)가 참석했다. /쿠첸

그 효과는 폭발적이었다. ‘브레인’과 ‘그레인’ 광고는 지금까지 밥솥 광고에서 볼 수 없었던 의인화 기법으로 제작돼 밥솥과 김연아가 함께 맛있고 건강한 밥을 짓기 위한 여정이 재미있게 소개됐다. 광고의 성공은 시장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브레인’ 밥솥은 2023년 8월 광고 이후 전월 대비 판매량이 약 262% 성장했고, 매출도 3.5배 이상 증가했다.

‘그레인’ 밥솥이 출시된 2024년 쿠첸은 6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브레인’과 ‘그레인’은 소위 ‘연아밥솥’으로 불리며 쿠첸의 대표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쿠첸과 김연아의 동행은 현재 진행형이다. 올해에는 국내 최고 2.2 초고압을 탑재한 ‘123 밥솥’의 모델로 3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다. 쿠첸 관계자는 “김연아는 단순한 모델을 넘어 쿠첸에 있어 의리와 신뢰의 존재”라며 “앞으로도 김연아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2009년 삼성전자 '연아의 햅틱' 광고(왼쪽), 지난 9월 출시된 쿠첸의 '123 밥솥' 광고. /삼성전자, 쿠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