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돌아왔다.
이번 작품은 박 감독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래전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읽은 뒤 마음을 빼앗겨 꼭 영화화하고 싶었단다. 그는 절판됐던 원작 소설이 2006년 재출간되었을 때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나는 ‘모가지’라고 한국 제목을 붙이고 싶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이 작품은 약 20여 년 뒤 박 감독의 손을 거쳐 ‘어쩔수가없다’는 제목으로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박 감독은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제목을 결정하면서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원작 제목이 ‘도끼’이기 때문에 그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끼’가 ‘해고’라는 의미인 건 영어에서 통하는 거였다”라며 “‘모가지’라고 하고 싶었는데 주변에서 기겁을 하더라”라고 했다. 이어 “‘어쩔수가없다’와 ‘가을에 할 일’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최종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제목에 띄어쓰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감탄사처럼 한 단어로 받아들였으면 했다”라며 “제가 잘 그런다. 생각해서 튀어나오는 말이 아니고 툭 튀어나오는 말, 아무 데서나 남발하는 감탄사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제지업에 종사하던 주인공 만수(이병헌 분)가 실직한 뒤 재취업을 준비하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렸다. 박 감독은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한 주인공 캐릭터에 크게 공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저희는 늘 잠재적인 고용 불안에 대한 공포가 있다.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이병헌, 손예진 등 배우들도 모이면 그런 얘기를 많이 한다”라며 “젊을 때 다 두려운 때가 있었고, 지금 잠깐 안정돼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남 얘기라고 절대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박 감독은 “제지업이 낯선 분야이긴 하지만 ‘종이를 만드는 데 목숨을 건다’, ‘삶 그 자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라며 “그게 좋다는 건 아니다. 어리석은 일이지만, 예를 들면 저처럼 ‘영화가 삶 그 자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딱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했다.
박 감독은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앞서 ‘비밀은 없다’ 등 영화에서 손예진의 훌륭한 연기를 많이 봤기 때문에, 섬세한 표현을 하는 역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각본을 볼 땐 비중이 작다고 느낄 수도 있어서 ‘해줄까?’ 하는 걱정도 됐다”고 솔직히 말했다.
손예진은 박 감독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출연 의사를 밝히며 “영화 보고 나온 친구들에게 ‘너 그 영화 왜 했어?’라는 얘기만 안 듣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박 감독은 “그 말이 정말 무섭더라”라며 “그날부터 약속을 지키느라고 각본도 많이 고쳤다. 분량도 조금씩 늘어났고 대사 한 줄이라도 더 재밌게 고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어 “리딩, 촬영 내내 손예진과 문자를 많이 주고받았다”며 “편집 과정에서도 손예진 캐릭터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영화가 공개된 뒤 외신과 관객들 사이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비슷하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영국 BBC는 ‘어쩔수가없다’를 두고 “올해의 ‘기생충’”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대해 박 감독은 “크게 보면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고, 블랙코미디 요소를 다루고 있다. 그런 면에서 외국에서 볼 땐 비슷하다고 보는 것도 이해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기생충’이 계급 간 전쟁이라면, ‘어쩔수가없다’는 하나의 동일한 중산층 계급 안에서의 전쟁”이라며 “어떤 면에서는 더 처절하다고 볼 수 있다. 중산층 생활 수준에서의 전락을 피하겠다는 아주 속물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얘기다. 그래서 불쌍하다기보다는 안타깝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한편 ‘어쩔수가없다’는 베니스국제영화제와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데 이어, 외신들의 호평이 잇따르면서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지난주 개막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였으며, 24일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