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1980년대 법조기자로 뛰던 시절, 그는 아주 잘나가던 검사였다. 검찰 핵심 보직에서 일하며 명민한 두뇌, 반듯한 성품, 절제된 처신으로 안팎의 신망을 사고 있었고 장차 검찰총장・법무장관감이란 얘기도 있었다.

<80년 한결같이>란 제하의 자서전을 펴낸 원로법조인 이진강 전 대한변협회장 /사진= C영상미디어 양수열기자

그러던 그가 갑자기 협심증으로 쓰러졌다. 이후 그는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몇 년 뒤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개업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면서 다시 두각을 나타내 서울지방변호사회장,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역임하며 변호사들의 수장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제 팔순이 된 이진강 변호사. 그가 얼마전 자서전을 보내왔을 때 자기 자랑을 담은 그저 그런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자신이 40대에 겪었던 병이 협심증이 아니라 우울증・불안・공황 장애 등이 섞인 마음의 병이었으며, 때로 죽음까지 갈 수 있는 위중한 상태로 4년여 넘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아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고백한 내용이었다.

10여년전 나 역시 마음의 병을 겪고 고생했던 터라 동병상련을 느꼈다. 극복해나가는 과정과 방법, 이를 일반 대중에게 기록으로 숨김없이 밝힌 것에도 마음이 움직였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고문치사사건 당시 이진강 중수부 1과장은 박군이 경찰로부터 고문으로 숨진 사실을 언론에 확인해주었다. /출처=나무위키

# 이진강 부장검사가 대검 중앙수사부 1과장으로 일하던 1986년에서 1988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획을 긋는 시기였다. 막강했던 전두환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뤄진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는 검찰 수뇌진을 보좌하면서 ‘부천서성고문사건’(1986년 6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1987년 1월), ‘6월 항쟁’(1987년 6월) 등 숱한 시국사건은 물론 6.29 선언 이후 개헌, 대통령선거, 6공 탄생, 5공비리 수사 등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대표적인 검찰 실무참모였다.

엄청난 스트레스와 업무강도 속에서 쉴새없이 일하던 그는 1988년 6월 어느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곧 깨어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후 불안증과 무기력증이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덮쳤다.

병원에 가도 특별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고 심장약이라고 처방해준 약을 먹어도 새벽이면 심장이 떨리고 식은 땀으로 속옷이 흠뻑 젖고 낮에는 사무실에서도 겁이 나고, 어지럼증에 곧 죽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증상은 1년이 지나고 2년이 되어도 계속 됐으며 갑자기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 가는 일들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런 가운데 그는 이를 악물고 검찰 간부로 일을 계속 수행했으며 상부에서도 “조직을 위해 일하다 생긴 병”이라고 배려를 했다.

그러다 3년차되는 1990년부터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항우울제 약과 수면제 덕분에 증상이 훨씬 호전됐으나 대신 매일 한웅큼씩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의존성이 생겨났다. 또 신체 부작용과 함께 또다른 불안감과 초조감이 엄습하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모돼 괴롭혔다.

병원에선 정신과병동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계속 권유했는데 만약 검찰간부가 정신병원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알려지면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런데 반전의 계기는 친지가 갖다준 책이었다. 일본인 저자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가 쓴 <생명의 실상>이란 40권짜리 책인데 “인간에겐 자연치유능력이 있어 약이 필요 없으며, 정말로 병을 이기려면 인생관을 전환하고 자재무애(自在無碍)한 생명의 실상에 눈을 떠라”는 것이 핵심 메시지였다.

그걸 자나깨나 읽으면서 점차 약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겨서 복용량을 줄여나가기 시작했고 내친김에 감기약, 위장약도 끊었다.

조금씩 몸을 추스르며 대입시험을 둔 딸과 막내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 근처 절로 가서 ‘대입 합격’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검사 시절 소원했던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쏟으며 아버지 노릇을 하다보니 외출공포증과 무기력증이 조금씩 없어져갔다.

또한 긍정훈련을 배워 매일 새벽 대모산에 올라 ‘우주의 지구를 움직이는 무한한 힘이 내게 있다’는 자기 최면 주문을 외웠고, ‘기(氣) 운동’, ‘단전호흡’ 등 운동을 하루도 쉬지 않고 30~40분씩 했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명상을 하고 좋은 책과 불경을 접하면서 점차 마음이 편안해지고 깨달음이 일어나면서 출세욕이나 두려움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됐다. 물론 신체 건강도 되찾았다.

지금은 삶의 여유와 감사 속에 사는 이진강 변호사. 30년 넘게 마음공부를 많이 한 그는 힘들거나 나쁜 일이 찾아오면 ‘아, 나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기려고 그러나?’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지게 됐다고 한다. /사진= C영상미디어 양수열기자

# 마음의 병은 당장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여러 선한 마음과 활동이 쌓이면서 조금씩 변화되고 치유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는 발병한 지 6년이 지난 1994년 9월 사표를 내고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이제 그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는 방법을 터득했고, 출세 욕심을 버리고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채우게 됐다.

인생은 신기하게도 아등바등하는 마음을 버리자 좋은 일이 저절로 생겨났다. 일면식도 없는 변호사들이 찾아와 함께 하다 보니 서울지방변호사회장, 대한변협회장 등을 하게 됐고 장관급인 방송통신심의위원장, 대법원 양형위원장 등으로도 일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목표를 두고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를 찾아온 ‘선물’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인정 안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병마로 낙마하게 된 이유가 과도한 업무로 인한 번아웃(burnout)과 출세욕망, 5공비리 수사과정에서 인간적 갈등 외에도 그가 가진 법조인으로서 양심(良心)도 작용했다고 본다. 독재 정권 시절 본의든, 본의 아니든 많은 엘리트 법조인들이 ‘법률기술자’로 전락하는 일을 수행해 왔으며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면의 양심의 소리 등이 합쳐져 그는 결국 쓰러졌지만 그것이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들고 훨씬 유연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그를 거듭나게 만들었다고 나는 이해한다. 그런 관점에서 현대 정신의학의 대가 칼 구스타프 융이 말했듯이 ‘질병은 자연이 준 선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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