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 ‘B3713′의 ‘애플&콜라비’(앞)와 ‘펌킨&펌킨&펌킨’./조혜원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호주 멜버른에서 막 요리를 시작한 나와 마주한 이는 영국 출신 앤드루였다. 대머리에 키가 컸던 그는 요리사로 일하다 기타를 쳤고 다시 먹고살기 위해 요리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샐러드의 종류가 그리 많은지 처음 알았다. 뉴욕 월도프(Waldorf) 호텔에서 처음 선보인 월도프 샐러드는 사과와 호두, 셀러리가 꼭 들어갔다. 이탈리아 시저 샐러드는 안초비를 갈아 만든 시저 드레싱, 베이컨, 구운 닭가슴살, 로메인 상추가 꼭 들어갔다. 서양 요리 문법에 익숙한 이들은 이 조합을 이미 알거나 쉽게 익혔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달걀 노른자에는 후추 빼고 소금만 쳐. 후추 색이 튀니까. 꼭 후추를 써야 한다면 백후추를 쓰고.” 앤드루는 샐러드 재료 다듬는 법부터 미세한 디테일까지 엄청난 인내심으로 나에게 알려줬다.

건강을 신경 쓰는 트렌드는 더 이상 트렌드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한국에서도 샐러드는 엄연히 식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서울 강남구청역 영등고등학교 근처 주택가에 가면 진한 녹색으로 외관을 칠한 ‘mmn’이 있다. ‘mmn’이라 쓰고 ‘미미네’라 읽는다. 문 여는 오전 11시, 손님들은 시간에 맞춰 모든 테이블을 채웠다. 크루아상 위에 요거트에 버무린 닭고기와 허브의 일종인 딜을 올린 ‘그릭치킨’은 그 자체로 한 끼 식사가 가능한 구성이었다. 바삭한 크루아상과 부드러운 닭고기가 대조를 이뤘다. 보통 북유럽 음식에 자주 쓰는 딜 덕분에 이국적인 느낌도 들었다.

대표 메뉴인 ‘mmn 샐러드’는 상추, 구운 베이컨, 체더 치즈, 아보카도, 적양파, 크림치즈, 옥수수가 들어갔다. 전형적인 멕시코 음식 조합이었다. 살짝살짝 엿보이는 매콤한 맛과 바삭한 식감, 아보카도와 크림치즈의 부드러운 찰기가 한여름 축제처럼 경쾌하게 어울리며 맛에 리듬을 만들었다. 건강을 위한다는 비장한 결의 없이 그저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이 샐러드를 선택할 것 같았다.

압구정역 안다즈호텔 1층에 문 연 ‘부베트’는 파리, 뉴욕 등 세계 여러 곳에 지점을 둔 브런치 카페다. 와인색으로 칠한 외관은 이곳의 정체성을 보여줬다. 좁은 테이블과 앙증맞은 메뉴판까지 현지 느낌을 살렸다. 프랑스의 국가대표급 샐러드를 모아놓았다. 대파의 흰 부분을 익혀 차갑게 식힌 뒤 마요네즈에 으깬 달걀, 코니숑 같은 부재료를 넣어 뿌린 대파 샐러드(Poireaux)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종류였다. 익힌 대파에서는 설탕과 다른 은근한 단맛이 길게 뽑혀 나왔다. 달걀이 섞인 소스는 대파에 없는 고소함을 빈틈없이 채워줬다.

세계 3대 샐러드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갈 니스식(式) 샐러드(Salade Nicoise)는 알감자와 줄기콩, 참치, 안초비, 반숙 달걀이 푸짐하게 올라갔다.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모자람 없이 채울 수 있는 구성이기도 했다. 식힌 알감자는 이에 콕콕 박히는 차진 식감에, 바삭하게 부서지는 줄기콩과 로메인 상추를 켜켜이 쌓아올린 이 샐러드는 자체가 완결성을 지닌 건축물처럼 느껴졌다.

강남구청역 뒷골목에 가면 작은 정원을 갖춘 ‘B3713′이 있다. 북유럽에서 경력을 쌓은 주인장이 누룩과 같은 발효 음식과 기법을 써서 음식을 내는 곳이다. 통창이 나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집에 들어서니 일자로 쭉 뻗은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무대처럼 홀을 향해 열려 있는 주방에는 요리사 몇몇이 춤을 추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종의 리소토인 ‘치즈&그레인’은 그라노, 파르미자노, 콩테 등 세 종류의 치즈를 섞어 썼고 위에는 끓여 말린 누룩 파우더, 방풍나물을 올렸다. 힘이 강한 재료들이 큰 줄기를 만들며 어울리는데, 마치 기악 합주곡을 바로 앞에서 듣는 듯 경쾌한 기분이 들었다.

‘펌킨&펌킨&펌킨’은 익한 호박과 구운 호박씨, 호박 퓌레, 호박씨에서 뽑은 기름까지 호박의 모든 것을 쓴 일종의 익힌 샐러드였다. ‘호박의 모든 가능성’이란 부제가 어울릴 만한 이 메뉴는 한입 한입 먹을 때마다 자연이란 배경을 토대로 무한히 이어지는 변주곡을 듣는 것 같았다. 강원도 양구산 사과로 만든 ‘애플&콜라비’는 사과를 얇게 썰어 포도 드레싱에 절인 뒤 돌돌 말아 진안 마이산 돌탑 같은 모양으로 담아 냈다. 일교차 큰 양구 펀치볼에서 자란 사과는 조직감이 치밀했고 단맛과 신맛의 밀도도 높았다. 현대미술을 보는 듯한 담음새, 재료가 지닌 잠재력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조리법으로 샐러드라는 장르에 대해 다른 시각을 안겨줬다. 그 시각으로 바라본 풍경에는 요리사가 쌓아온 시간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때 앤드루가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들도 그랬다. 샐러드에 올라가는 달걀 노른자에 소금을 뿌리지 않았을 때, 앤드루는 처음에는 지적을, 두 번째에는 욕을 하며 화를 냈다. “음식은 늘 제대로 나가야 된다고!” 그에게 그 디테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고 프로의 차이는 타협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었다. 삶은 달걀에 뿌린 약간의 소금. 그 소금이 나에게는 무엇인지 샐러드를 먹을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mmn(미미네): mmn 샐러드 1만2500원, 그릭치킨 1만1000원.

#부베트: 대파 요리 1만원, 니스식 샐러드 2만5000원.

#B3713: 애플&콜라비 1만6000원, 치즈&그레인 3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