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조연만 하던 배우도 좋은 작품과 감독을 만나면 주연으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얻는다. 식탁에서 조연 취급 받는 알배추와 양배추도 비슷한 처지다. 겉절이(알배추)나 쌈 채소(양배추) 같은 조연으로 익숙하다. 그렇지만 불[火]과 만나면 운명이 바뀐다. 흔히 채식은 ‘건강한 맛’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올리브유와 화이트와인 식초 등으로 맛을 더해 편견을 깨는 화려함을 자랑한다.
◇일품 요리로 재탄생 ‘알배추 구이’
잎사귀 노란빛이 인상적인 알배추는 돼지 수육을 싸 먹는 용도나 겉절이 재료로 익숙하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 ‘로컬릿’ 남정석 셰프는 2020년 ‘알배추 구이’(1만1000원)를 선보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 쓰는 조리법인 시어링(센 불에서 재료의 겉을 코팅하듯이 굽는 조리법)을 알배추에 적용했다.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와 버터를 입혀 구워내 고소한 향이 퍼져 나갔다. 잎사귀 얇은 부분을 검게 그슬리듯 구워낸 이 식당 ‘알배추 구이’는 스테이크용 나이프로 썰어 먹는다.
화이트와인 식초로 밑간을 한 것이 인상적이다. 백김치의 쨍한 맛을 살짝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김치를 구워 먹을 때의 불향이 함께 느껴진다. 경상도식 배추전은 배추에 따로 밑간을 하지 않아 배추 자체의 단맛과 기름의 고소한 맛 두 가지를 축으로 한다. 로컬릿의 알배추 구이는 화이트와인 식초로 산미를 더했기 때문에 단맛과 고소한 맛에 이어 신맛을 추가하며 맛에 기둥 하나를 더한 셈이다. 버터와 올리브유를 뜸뿍 넣어 느끼해 보이지만 산미 덕에 풍성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남정석 로컬릿 셰프는 “‘화이트와인 킬러’로 인기가 많다”며 “다른 식당에서 찾아와 레시피를 배워 갈 정도로 인기”라고 했다.
◇다이어터의 친구 양배추의 변신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양배추 스테이크’ 레시피가 인기리에 공유된다. 간단히는 소금·후추로 간을 하고 올리브유를 둘러 굽는 조리법이다. 구울 때 살짝 요령이 필요하다. 알배추와 달리 밑동을 남겨 잘라도 뒤집을 때 자칫 형태를 잃고 부서지기 일쑤다. 이쑤시개 등으로 양배추를 고정해주면 웨지(쐐기) 모양을 유지하기 쉽다. 충분히 색이 날 때까지 겉을 태우듯 바삭하게 굽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불향이 올라와야 풍미가 극대화된다.
그냥 먹어도 좋지만 취향에 따라 여러 소스·드레싱을 얹어 먹으면 맛의 표정을 바꿀 수 있다. 시판 갈비 소스를 한 스푼 정도 뿌려 함께 구우면 갈비 맛 양배추 구이를 만들 수 있다.
알배추 구이처럼 산미를 더한 소스와 함께 먹으면 궁합이 좋다. 지난 2월 출간돼 1만부 가까이 팔린 ‘채소 마스터 클래스’(세미콜론)에서는 이탈리안 파슬리와 적양파 곱게 간 마늘에 레몬즙, 디종 머스터드, 화이트와인 식초를 넣어 먹는 레시피를 소개했다. 저자 백지혜 요리 연구가는 “상큼한 드레싱이 양배추 특유의 들큼한 냄새를 잡아 주고, 아삭한 양파의 식감은 곁들여 먹었을 때 씹는 재미를 더해준다”고 썼다.
알배추는 100g당 열량이 15㎉, 양배추는 100g당 24~30㎉ 정도다. 열량이 낮아 배불리 먹어도 되는 ‘다이어터’의 음식이지만, 바꿔 말하면 기름, 치즈, 소스 등을 더해도 크게 살 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냉장고에서 잠자고 있는 알배추와 양배추에 새 옷을 입힐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