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말죽거리 잔혹사’(2004)를 돌려 보니 친숙하고 또 낯설었다. 일단 제목처럼 잔혹함이 익숙했다. 나는 1991년에 고등학교를 입학해 1994년에 졸업했다. 따라서 영화 속 현실과는 십여년 쯤 시차가 나는데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교사와 학생들 양쪽 모두에서 만연하는 구타에 사정없이 ‘고속도로’를 내 버리는 잔혹한 두발 및 복장 단속, 도시락 반찬을 노리는 피라냐 같은 급우들까지. ‘역시 대한민국의 학교는 잔혹한 정글 같은 곳이구나’라는 생각만 새삼 곱씹으며 안 좋은 기억을 며칠 동안 줄창 떠올렸다.
한편 떡볶이가 낯설었다. ‘잔혹사’는 1978년 갑자기 강남으로 전학을 온 현수(권상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땅값이 엄청나게 오를 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으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사온 그는 말죽거리 인근의 악명 높은 정문고로 배정을 받는다. 말수가 적고 크게 티를 내지 않는 성격 탓에 현수는 무해한 전학생으로 분류되고, 이소룡의 열혈팬이라는 이유로 학교의 ‘짱’인 우식(이정진)과 친해진다. 그리고 어느 날, 현수는 하굣길 버스 안에서 올리비아 핫세를 꼭 닮은 은주(한가인)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말 한 번 못 걸어보다가, 불량한 선배들로부터 은주를 보호해주고 드디어 안면을 튼다. 그리하여 현수는 우식, 햄버거(박효준)와 더불어 은주와 떡볶이를 같이 먹으며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떡볶이는 떡볶이인데 낯설다니, 나는 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낸 걸까? 부지런히 떡볶이집을 오가는 영화 속 고등학생들을 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떡볶이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맛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일단 목걸이 지갑 속에 달랑 왕복 버스 차비만 넣고 다녔으므로 사 먹을 돈이 없었다. 또한 학교 앞 분식집 등에서 파는 떡볶이는 집에서 불량식품으로 분류돼, 돈이 있더라도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었다. 한편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학교 매점의 사발면과 빵으로 허기를 채우느라 역시 떡볶이를 등한시했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아예 모든 것으로부터 원천봉쇄를 당해버렸다. 자율 아닌 자율학습을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느라 떡볶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먹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떡볶이와 친분을 쌓을 기회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마감했다.
그래서 다른 음식보다 유난히 떡볶이가 낯설고, 이는 생활인뿐만 아니라 직업인 즉 음식평론가로서도 느끼는 일종의 결핍이다. 몇 년 전에는 이 결핍을 좀 메워보고자 작심하고 떡볶이를 먹었던 적도 있다. 떡볶이가 ‘맛없는 음식’ ‘양념 맛으로 먹는 음식’이라고 공격받던 시기였다. 당시 열심히 먹었던 결과는 별개의 글로 이미 정리했으므로 동어반복은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같은 이름 아래 수 없이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므로 사실 ‘떡볶이는 맛없는 음식이다’라는 주장은 무의미하다. 둘째, 이탈리아의 파스타부터 심지어 버터를 바른 빵에 이르기까지 탄수화물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고 덧대는 양념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
떡볶이집에서 발걸음을 내디딘 현수와 은주의 관계는 잘 풀리지 않았다. 은주가 현수보다 스토커에 가깝도록 집요하게 몰아붙인 우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후 현수는 우식을 꺾고 학교 짱 자리에 오른 종훈(이종혁)과 일당을 혼자 때려 눕히고 그 업보로 학교를 그만둔다. 한편 은주는 영화에서 분명히 드러내지 않지만, 우식과 함께 가출했다가 돌아온 뒤 재수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각각 검정 및 재수학원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가볍게 마주치고 서로를 지나 보낸다.
둘은 이후 또 다시 만나 떡볶이를 먹었을까? 만약 이제 막 먹으러 갈 참이라면 마곡동 ‘어닝바’를 추천해주고 싶다. 지나치게 맵지 않은 떡볶이 양념을 달콤하고 시원한 밀크셰이크로 달래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너무 뻔한 말 같지만 튀김은 바삭하고 순대는 탱탱하니, 떡볶이집이 별처럼 많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은 갖추었다. 딱딱한 무침 만두만 피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