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충정로 '옐로우보울'의 치즈몬스터, 카르보나라, 가든샐러드(앞에서부터).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토요일 저녁 주방에는 붉은 피가 흘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가 쌓여 작은 산을 이뤘다. 요리사들의 하얀 옷은 결투를 마친 검투사처럼 벌겋게 물들었다. 일요일 점심이 되면 핏기가 싹 가셨다. 대신 하얀 밀가루와 노란 달걀이 날아다녔다. 토요일 화려한 옷을 입었던 손님들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부스스한 머리와 헐렁한 옷이 차지했다.

“스크램블 두 개, 프렌치 토스트 세 개, 서니 사이드 업 추가!”

제식훈련을 하듯 큰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이름은 폭신하고 달콤했다. 팔에 털이 가득하고 배가 불쑥 나온 주방장이 작은 프라이팬을 붙들고 그 이름을 받들었다. 2시가 넘어 주문이 잦아들면 그제야 찬물 한번 들이켤 시간이 생겼다. 어두운 주방에서 밖으로 나가 햇볕을 맞았다. 쭈그려 앉은 저 너머 테라스에는 손님들이 밝은 태양 아래 느긋이 기대앉아 있었다. 브런치라는 이름에는 궂은비도 음침한 구름도 없다. 나긋한 지중해의 바람이 분다. 요리사들은 브런치라는 우아한 백조 아래 쉼 없이 움직이는 작고 보잘것없는 다리 같았다.

서울 홍대 인근에 작게 문을 연 ‘버터밀크’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브런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팬케이크, 프렌치토스트 같은 전형적인 브런치 메뉴가 모두 모였다. 홍대 앞을 가로지르는 좁은 도로 한편에 자리 잡은 이곳은 어느 때나 자리 잡기가 힘들다. 메뉴는 모두 1만원이 넘지 않는다. 이 집에 온 이상 누구나 먹는 메뉴는 ‘버터밀크 팬케이크’다. 반죽에 버터밀크를 넣어 은은히 산미가 감도는 팬케이크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부풀어 있다. 팬케이크 위에 앙증맞게 올린 버터 한 조각, 옆에 단출하게 자리한 샐러드, 베이컨, 스크램블 에그, 매시드 포테이토를 보니 왜 사람들이 그렇게도 줄을 서는지 반쯤 이해가 됐다.

칼질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저절로 속을 내보일 듯 부드러운 팬케이크를 한입 넣었다. 혀 위에 맴도는 꾸밈 없는 단맛, 부서지듯 녹아나는 부드러운 질감에 한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 살아있는 것은 그 생생한 감각뿐이었다. 직접 만든 리코타 치즈, 요거트, 꿀을 곁들인 ‘꿀딸리요’라는 이름의 샐러드는 동화 속 공주들이 먹는 음식 같았다.

‘버터밀크’가 일본식 아기자기한 브런치를 선보인다면 한남동 ‘써머레인’은 그보다 호방하고 자유로운 호주식 브런치라고 볼 수 있다. 비탈길에 작은 차양을 내건 이 집 역시 늘 줄이 길다. 종업원들은 쉴 새 없이 ‘플랫 화이트’ 같은 호주식 커피를 뽑았고 사람들은 먼 길 떠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큼지막한 접시 몇 개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베이컨 와플 에그 베네딕트’는 소 혀만큼 기다란 베이컨 몇 장에 아보카도, 수란, 그리고 달걀노른자와 식초로 만든 홀렌데이즈 소스를 듬뿍 뿌려 냈다. 접시를 가득 채운 음식은 보기만 해도 모자람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베이컨의 굽기, 소스의 염도, 아보카도의 숙성도 등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는 호주에서 먹던 브런치에 가까웠다. ‘크루아상 프렌치 토스트’는 반으로 가른 크루아상 아래 베이컨, 바나나, 프렌치 토스트를 밑에 깔아 높게 쌓았다. 그 위에 메이플 시럽, 견과류, 블루베리를 흩뿌려 화려한 마무리를 했다. 맛도 그 모습과 같았다. 기름지고 짜고 단맛이 모여 상승작용을 이끌었다. 이 음식을 먹고 나면 바다에 뛰어들어 서핑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자리를 옮겨 충정로에 가면 구세군빌딩 지하에 ‘옐로우보울’이 있다. 브런치 메뉴만 전문으로 하는 집은 아니다. 샐러드, 파스타를 비롯해 친숙한 양식 메뉴를 모두 갖췄다. 처음에는 좁은 주방에서 요리사들이 곡예 하듯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가가 보니 곡예보다는 파트너와 합을 맞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탱고에 가까웠다.

올려진 수란을 직접 으깨 비벼 먹는 ‘카르보나라’는 진득한 소스를 내세우며 이탈리아 정통이라고 유난을 떨지 않았다. 파르미자노 치즈 등을 넣어 풍성하고 진득한 소스에 오히려 더 정감이 갔다. ‘가든샐러드’는 구운 호박, 가지, 감자, 자몽, 비트 등 갖은 채소와 과일을 한데 담았다. 채소의 굽기나 과일의 신선도 모두 사람이 몰리는 집답게 모자라거나 오래된 느낌이 없었다.

식빵 사이에 모차렐라 치즈, 체더 치즈, 베이컨을 넣고 구운 ‘치즈몬스터’는 4등분 중 한 조각만 먹어도 한 끼 식사가 됐다. 접시까지 흘러내리는 치즈, 바삭한 식빵, 짭짤한 베이컨. 이 모두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은 피도 눈물도 없는 서사시가 아닌 파스텔 톤의 동화를 지어보리라. 백조의 짧은 다리가 아니라 백조가 되어 보리라.

#버터밀크: 버터밀크 팬케이크 세트 7800원, 꿀딸리요 7000원.

#써머레인: 와플 에그 베네딕트 1만7000원, 크루아상 프렌치토스트 1만6000원.

#옐로우보울: 가든샐러드 1만1900원, 카르보나라 1만6000원, 치즈몬스터 1만1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