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친구들의 입에서 소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지 선생님이 내뱉은 문장 한마디 “오늘은 비프 웰링턴(Beef Wellinton)을 만들 거예요” 때문이었다. 소 안심을 페이스트리 반죽에 싸서 굽는 비프 웰링턴은 영국인에게 특별한 요리다. 나폴레옹과 싸웠다는 웰링턴 공작의 이름을 따서 만든 요리라는 설도 있지만, 소의 가장 비싼 부위인 안심을 통째로 쓰고 영국인이 그토록 좋아하는 페이스트리를 덮어 굽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상치 않았다.
영국 친구들은 이른바 ‘국뽕’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신중히 비프 웰링턴을 만들었다.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뭐 이렇게 번잡스러운 요리가 다 있나’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며 요리책에 나온 대로 공정을 따라갔다. 백지 상태에서 만든 비프 웰링턴은 꽤 그럴듯했다. 예전을 추억하며 비프 웰링턴을 찾노라니 하는 식당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 복잡한 음식을 고집하는 집이 몇 있다.
먼저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가면 ‘플레눼’가 있다. 코리아나 호텔 2층인데, 연회장을 지나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가야 나온다. 광화문이 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넓은 실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놀라움이 든다.
내놓는 음식도 그렇다.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케 하는 글씨체의 메뉴를 훑어보니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영국 요리가 줄줄이 올라가 있었다. 피시파이는 으깬 도미 살을 크림 소스에 익힌 다음 그릇에 담고 페이스트리를 올려 구웠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페이스트리를 찢어 밥을 비비듯 크림 소스에 푹 담갔다. 도미 살이 넉넉하게 들어 숟가락을 들 때마다 큰 살덩이가 따라 올라왔다. 입에 넣으면 버터 향이 콧속에 가득 차고 진득한 소스는 위장으로 서서히 흘러내렸다.
비프 웰링턴은 이름만큼 당당한 위용으로 테이블에 올랐다. 거대한 접시 한편에 쌓인 삶은 완두콩은 영국 시골 펍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4등분된 비프 웰링턴은 용의 허리를 잘라놓은 것 같았다. 붉은 기가 살아 있는 안심, 안심을 감싼 생햄, 다져서 볶은 양송이, 페이스트리가 차례로 겹을 이뤘다.
한강을 건너 삼성동에 가면 ‘428 레스토랑’이 있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호텔 입구를 지나 타일이 깔린 좁은 복도를 지나면 역시 숨겨진 식당이 나온다. 햇빛이 머무는 작은 정원이 딸린 넓은 테라스에 앉으면 여기가 엄청난 땅값을 자랑하는 서울 강남이란 사실을 순간 잊고 만다.
현대식 유럽 요리를 표방하는 이곳은 파스타를 포함한 여러 서양 요리를 모두 메뉴에 올렸다. 소고기를 듬뿍 쓴 리가토니 파스타, 송로버섯을 얇게 저며 올린 감자튀김, 광어 카르파초 등 떨어지는 구색이 없다. 그중에서도 진득한 화이트 소스에 송로버섯을 곁들여 먹는 감자 뇨키는 거슬리는 감각이 전혀 없이 부드럽고 미끈하게 떨어지는 맛과 식감을 지녔다.
이곳이 내세우는 대표 메뉴도 비프 웰링턴이다. 크기는 아담하지만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듯 좌우대칭이 완벽한 모양을 지녔다. 안심은 오차 없이 레어로 구웠고, 페이스트리는 다이아몬드 브릴리언트 커팅을 보는 듯 반짝였다. 소뼈를 우려 졸인 소스를 흠뻑 뿌렸고, 소스가 채 고기에 젖기 전에 접시를 비웠다.
다시 강을 건너 경리단길에 가면 ‘꼼모아’가 있다. 작은 몸에 둥근 어깨를 지닌 주인장이 홀로 주방을 보는 이곳은 메뉴가 거창하거나 인테리어가 찬란하지 않다. 대신 테이블 몇 개에 오래 묵어 단단해진 메뉴들이 토박이처럼 자리를 지키는 곳이다.
성게알 크렘 브륄레는 달걀과 크림, 설탕으로 맛을 낸 크렘 브륄레 위에 성게알과 아보카도를 올려 맛의 대조를 이끌어냈다. 프랑스 요리는 짠맛이 지배적이지만 체리⋅무화과와 같은 단맛을 과감하게 쓰는 경우도 많다. 오리 다리 콩피는 오리 다리를 저온에서 기름에 푹 익힌 프랑스 전통 요리다. 충분히 익어 결결이 찢어지는 오리를 신맛과 단맛이 공존하는 오렌지 당근 퓌레와 함께 먹었다.
이윽고 하루 전 예약해야 하는 비프 웰링턴이 나왔다. 으스대며 뽐내는 느낌 없이 단정하게 접시 위에 자리한 비프 웰링턴은 예전에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맛이었다. 페이스트리는 과하거나 부족하게 익은 부분이 없었고 정확한 늦가을 갈색을 지녔다. 기름기 없이 촉촉한 안심의 부드럽고 우아한 식감이 이에 닿았다. 수분을 완전히 날려가며 볶은 버섯은 고기와 페이스트리 사이 이음쇠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곁들여 늦가을의 향기를 담은 부르고뉴 레드와인을 마셨다. 비프 웰링턴의 맛과 향이 와인과 만나 더 다채로운 층위를 이뤘다.
주인장은 가을바람처럼 차분히 손님을 살폈고 비프 웰링턴은 마지막 조각까지 맛이 물리지 않았다. 그리고 빈 접시를 앞에 뒀을 때 이 오래된 요리가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플레눼: 비프 웰링턴 8만원, 피시파이 3만5000원.
#428레스토랑: 비프 웰링턴 8만원, 트러플 뇨키 3만5000원.
#꼼모아: 비프 웰링턴 8만원, 성게알 크렘 브륄레 2만1000원, 오리 다리 콩피 2만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