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식사’에 대한 질문을 가끔 받는다. 맥락에 따라 답은 달라지지만, 파인다이닝(fine dining)이라면 미국 내파밸리의 ‘레스토랑 앳 메도우드(Restaurant at Meadowood)’에서 먹은 저녁을 꼽는다.

모든 음식이 훌륭했지만 최고의 접시는 고기도 생선도 아니었다. 바로 ‘텃밭 흙에 파묻어 구운 루타바가(스웨덴 순무)’였다. 특유의 흙 내음이 매력인 채소를 재배한 흙에 파묻어 구운 발상만큼이나 향이 빼어났으며, 풀 냄새 두드러지는 염소 젖 치즈와도 정말 잘 어우러졌다. 단순히 맛있다기보다 삶의 시야를 넓혀주는 한 접시였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기독교 공동체 사람들이 바베트가 준비한 최고급 프랑스 요리를 맛보는 장면./노르디스크 필름

영화 ‘바베트의 만찬’(1987년)은 삶의 시야를 넓혀주는 인생 식사에 대한 영화다. 1871년 9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 덴마크 유틀란트의 외진 기독교 공동체에 한 프랑스 여인이 발을 들인다. 그의 이름은 바베트(스테판 오드랑). 목사의 딸인 마르티나와 필리파 자매를 찾아왔다.

자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어려운 이들을 돕고 청빈과 복음의 삶을 실천하는 데 매진한다. 이들은 필리파의 옛 노래 스승인 오페라 가수 파팽의 추천서를 읽고도 바베트를 선뜻 거두지 못한다. 하지만 바베트는 파리 코뮌 봉기를 피해 멀리 덴마크까지 찾아온 갈 곳 없는 몸. 고민 끝에 자매는 요리를 잘한다는 바베트에게 부엌을 맡긴다.

14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바베트가 프랑스에서 편지를 한 통 받는다. 복권이 당첨돼 거금 1만프랑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자매는 부자가 된 바베트가 이제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100세 생일을 맞는다. 바베트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이는 목사의 생일 식탁을 프랑스 요리로 차리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자매는 평생 지켜온 청빈함이 위협받을까 두려우면서도 마지못해 승낙한다.

바베트는 직접 프랑스에 가서 공수해온 식재료로 최고급 요리를 선보인다. 거북 수프를 비롯해 캐비아(철갑상어 알)와 빈티지 샴페인, 배 속에 푸아그라(거위 간)를 채우고 바삭한 페이스트리 반죽에 올려 구운 메추라기와 최고급 피노누아 와인, 온갖 치즈와 과일까지 나오는 풀코스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노라고 잔뜩 긴장한 채 식사를 시작했던 자매와 공동체 사람들은 어느새 음식에 감화되어 서로를 용서하고 한결 더 가까워진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 등장하는 메추리 요리와 캐비아, 바다거북 수프(위에서부터)./노르디스크 필름

만찬이 끝나자 바베트는 자신이 프랑스 최고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였으며, 복권 당첨금 1만프랑 전부를 식사 준비에 썼노라고 밝힌다. 자매는 이야기를 듣고 아쉬워하지만 바베트는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으’며 이제 아무도 없는 프랑스로는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요리 장면을 워낙 생생하게 찍어 보는 내내 군침이 넘어가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속 음식 대부분은 ‘그림의 떡’이다. 거북이는 먹어서 안 되는 식재료고, 캐비아는 고가이며, 메추리는 구하기 쉽지 않다. 조리의 난도도 무척 높아 섣불리 흉내 낼 엄두도 나지 않는다.

만찬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맛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영화 속 샴페인인 뵈브 클리코(Veuve Cliquot)가 있다. 18세기만 하더라도 샴페인은 맥주처럼 기포가 크고 맛도 깔끔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을 27세에 남편과 사별한 아내(뵈브) 클리코, 즉 바르브-니콜 클리코 퐁사르댕(Barbe-Nicole Clicquot Ponsardin)이 오늘날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샴페인 브랜드 '뵈브 클리코'의 고급 라인 '라 그랑드 담'./조선일보DB

영화 속에서는 포도 수확 연도, 즉 ‘빈티지’가 표기된 뵈브 클리코를 마시는데, 아주 흔하지 않은 일이다. 샴페인은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해의 포도를 섞어 빚으므로 빈티지를 표기하지 않는다. 해당 연도의 포도가 아주 빼어날 때만 빈티지 선언을 하고 라벨에 표기하는데, 추가 숙성을 통해 가치를 한결 더 높인다.

그만큼 가격대가 올라가므로 웬만하면 ‘NV’, 즉 ‘넌 빈티지(Non Vintage)를 권한다. 750mL 한 병에 7만원 선. 회를 비롯한 해산물과는 검증된 궁합이며, 국민 음식인 치킨과도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