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이 국물을 버렸다. 농심은 지난달 20일 ‘신라면볶음면’을 출시했다. 소비자 반응은 성공적이다. 농심 관계자는 “출시 이후 3주간 대형마트 누적 판매량이 신라면과 짜파게티에 이어 3위에 올랐고,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게시물이 9000개 이상으로 관심도도 높은 편”이라고 했다.
면과 플레이크(동결 건조 건더기)를 2분 정도 끓인 뒤 물을 약간 남겨 분말 스프를 넣어 비벼 먹는 볶음면은 농심에 상당한 도전이다. 1986년 출시한 신라면은 자타가 인정하는 농심의 대표 브랜드. 신라면의 실패는 곧 농심의 실패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지난 봄 별세한 신춘호 창업자의 뒤를 이은 신동원 회장이 취임 후 처음 내놓은 제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농심이 신라면볶음면을 출시한 이유는 그만큼 국물 없는 라면이 인기이기 때문이다. 국물 없는 라면은 지난 3~4년간 라면업계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신라면 신제품을 볶음면 형태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농심도 “국내외에서 모두 국물 없는 라면이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며 “많은 소비자들이 볶음면 형태의 신라면 출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국물 없는 라면은 특히 젊은 층에서 인기가 높다. 시장조사업체 오픈서베이가 발표한 트렌드 리포트 ‘이트(Eat) 2018’에 따르면, 20대는 짜파게티·팔도비빔면·짜장불닭볶음면 등 국물 없는 라면을 주로 먹었다.
오픈서베이는 “20대에서는 국물 없는 면 트렌드가 라면을 넘어 스파게티·짜장면·쌀국수 등 한식·중식·일식·양식·에스닉푸드 등 모든 면 요리에서 발견된다”고 분석했다. 오픈서베이 황희영 대표는 “2030 젊은 층은 파스타 등을 통해 국물 없는 면을 많이 접했고, 깊은 맛이 나는 국물보다는 볶음면이나 비빔면 같이 다채로운 맛이 나는 음식을 더 좋아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편의점 GS25가 지난해 조사한 결과에서도, 10대들이 가장 많이 구매한 컵라면 제품 20개 중 8개가 국물 없는 볶음·요리형이었다. 40대 이상은 얼큰한 국물이 있는 ‘클래식’한 컵라면을 찾았다.
국물 없는 라면만이 아니다. 젊은 층은 국물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국방부는 지난해 ‘급식 빅데이터 시범사업’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2019년 9월부터 2020년 4월까지 육군 1개 대대 취사 식당에 급식 자동 측정 시스템을 설치, 장병들의 메뉴별 배식량과 잔반량을 측정·분석했다. 그 결과, ‘잔반이 많은 상위 10개 메뉴’ 중 4개가 민대구탕·광어매운탕·건새우아욱된장국·콩나물김칫국 등 국·탕류. 우삼겹된장찌개, 햄소시지찌개 등 찌개류 2개까지 합하면 총 6개가 국물 음식이었다.
‘푸드 트렌드’ 리포트를 발간하는 서울대 푸드비즈니스랩 문정훈 교수는 “요즘 젊은 층은 국물 있는 음식보다 없는 음식이 맛이 더 진하고 자극적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국물은 소스보다 심심할 수밖에 없다. 육수에 담긴 칼국수와 크림소스에 버무린 스파게티를 비교하면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뜨거운 온도 때문에 국물을 싫어한다는 분석도 있다. ‘대한민국을 이끄는 외식 트렌드’를 매년 출간하는 다이어리알 이윤화 대표는 “목젖이 델 정도로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며 ‘어 시원하다’ 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층은 너무 뜨거운 국물을 싫어한다”고 했다. “탄탄면, 마제소바 등 최근 유행한 면 요리를 보면 뜨겁지 않아요. 적당히 따뜻한 소스에 버무려 먹는 스타일이죠. 한국이 아열대에 진입한 이후로 우리 면 문화가 동남아시아처럼 바뀌는 경향도 보이고 있어요.” 문정훈 교수는 “뜨거우면 바로 먹지 못하고 식도록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덜 선호하는 이유가 된다”고 했다.
1997년 농심 ‘생생우동’ TV 광고가 히트를 쳤다. 광고 카피가 “국물이 끝내줘요”였다. 그토록 뜨거운 국물을 사랑하던 한민족의 입맛이 빠르게 메말라가고 있다. ‘국물도 없다’가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