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펍에 처음 가서 놀랐던 것은 사람들이 앉지 않고 서서 맥주를 마신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맥주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란 것이었다. 펍에 들어서면 기네스와 같은 큰 회사 맥주는 물론이고 특색 있는 소규모 양조장의 맥주 탭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맥주 각각의 특성에 맞게 온도도 따로 관리됐다. 바텐더의 기술도 뛰어났다. 표정은 무심했지만 맥주 거품을 정확히 유리잔의 4분의 3 부근에 맞췄다. 한국도 맥주 한두 종류로 끝나던 시절은 옛날이다. 조금만 발품 팔면 영국 못지않은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시대다.

서울 염리동 ‘미스터리브루잉컴퍼니’의 살시차 피자(앞)와 더그래버(오른쪽 앞)·라카브라커피스타우트(오른쪽 뒤) 맥주./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작은 가게들이 냇가의 조약돌처럼 올망졸망 모여 있는 서울 합정동에 가면 ‘서울브루어리’가 있다. 크지 않은 규모에 나무로 짠 테이블이 길게 자리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형광등 불빛 아래 얼굴을 붉히며 앉아 메뉴를 보면 간단하지만 신경을 쓴 모양새에 눈이 갔다. 간단하게 먹자면 ‘버팔로 윙’이 좋다. 특히 꿀과 생강을 써서 친숙한 맛을 낸 ‘스위트 진저 윙’은 여러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맥주에 치킨이 빠질 수 없듯 이 집에 와서 ‘골드러쉬 치킨’을 빼먹으면 섭섭하다. 닭 허벅지 순살을 쓰고 이 집에서 파는 골드러쉬 맥주로 염지를 하여 잡내를 없애고 은은한 향을 심었다. 어울리는 맥주는 역시 ‘골드러쉬 캘리포니아 커먼’이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화사한 꽃향과 허브향이 지배적이다. 상큼하고 청량한 기운에 입안에 남은 기름기가 싹 가셨다. 대척점에 있는 맥주는 ‘로버스트 포터’다. 검정에 가까운 진한 색은 보기만 해도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초콜릿을 씹는 것 같은 풍미와 달콤한 맛이 입에 가득 찼다.

성수동에 가면 성수동 1세대라고 부를 만한 ‘어메이징 브루어리’가 있다. 창고를 개조한 단층 건물에 넓은 앞마당이 있는 이 집은 맥주 종류에서 다른 집들을 압도한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맥주까지 포함하면 50여 가지 맥주가 한자리에 있다. 음식 메뉴는 피자가 주를 이루며 감자튀김 같은 곁들임 안주가 보인다. 하얀 부팔라 치즈를 올린 ‘마르게리타 부팔라 피자’ 쪽에 무게중심이 실린다. 나폴리식으로 도우를 숙성한 후 쫀쫀하게 구워냈다. 고온에 구워 도우 가장자리가 표범 가죽처럼 살짝살짝 거뭇하며 하얀 부팔라 치즈를 큼지막하게 툭툭 찢어 놓았다.

오래된 그림책처럼 두꺼운 맥주 메뉴판은 선택장애를 쉽게 일으킨다. 그럼에도 두 가지 정도를 고르라면 ‘첫사랑’이란 이름의 맥주가 쉽게 수위를 차지한다. 화사한 색깔처럼 오렌지 향의 목소리가 제일 큰 이 맥주는 첫사랑의 열병을 이미지화하여 만들었다고 했다. 시작은 화려하고 달콤하지만 뒤로 갈수록 호프의 쓴맛이 존재감 있게 다가왔다. 첫사랑의 결을 잇는 맥주는 ‘밀땅’이다. 바나나와 밀의 풍미를 살린 밀맥주인 밀땅은 달콤한 향이 큰 인사를 하듯 풍성히 느껴졌고 탄산감 또한 적지 않아 끝맛이 깔끔했다.

자리를 옮겨 공덕(염리동)에 가면 ‘미스터리 브루잉 컴퍼니’가 있다. 샐러드, 파스타, 햄버거 등 메뉴 구색은 빠지는 게 없었다. 하나만 고르라면 역시 피자다. 특히 ‘살시차 피자’는 흑맥주인 스타우트를 써서 피자에 올라가는 살시차(이탈리아식 소시지)를 직접 만들었고 절인 토마토, 바질 등을 써서 새콤하고 상큼한 맛을 동시에 잡았다.

본론으로 들어가 맥주를 보면 ‘더 그래버’로 시작하는 게 좋다. 망고와 같은 열대과일 향이 꽃다발처럼 풍성한 이 맥주는 쓴맛과 같은 공격적인 맛이 절제돼 있었다. 마치 동남아 해변에 온 듯 온화하고 화사한 맛에 웃음이 폈다. 더 강인한 녀석을 꼽자면 ‘라 카브라 커피 스타우트’를 손에 들어야 한다. 브라질 커피 원두를 넣어 에스프레소와 같은 강한 향이 훅 올라오는 이 맥주를 마시면 짙은 안개가 껴 있는 아일랜드 어디에 온 것 같았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우면 그때는 작은 수첩을 꺼내 일기를 써야 할 듯한 기분도 들었다.

맥주란 단발성 탄성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복잡다단한 감정과 느낌을 담은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드러쉬, 첫사랑, 짙은 밤, 이런 단어들을 총총히 떠올리며 맥주 잔을 들었다 놓았다.

#서울브루어리: 골드러쉬 치킨 1만8500원, 버팔로 윙 8000원, 골드러쉬 캘리포니아 커먼 5500원(355mL), 로버스트 포터 7000원(355mL). (070)7756-0915

#어메이징브루어리: 마르게리타 부팔라 2만2000원, 첫사랑 4900원(500mL), 밀땅 4900원(500mL). (02)465-5208

#미스터리브루잉컴퍼니: 살시차 피자 2만5000원, 더그래버 7900원(500mL), 라카브라커피스타우트 7900원(500mL). (02)3272-6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