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그곳은 지금 몇 시인가요? 이곳 프랑스 샹파뉴 랭스(Reims)는 아침 8시입니다. 샴페인 마시기 딱 좋은 시간이죠. 샴페인 마시기 좋지 않은 시간이 있겠습니까만(웃음).”
프랑스 샴페인 크루그(Krug) 창업자의 6대손 올리비에 크루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컴퓨터 화면 너머에서 인사를 건넸다. 아침·낮·저녁 인사를 한꺼번에 건넨 건, 그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와인 전문가·기자·인플루언서 80여 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인, 위스키 등 주류 업계가 온라인 시음회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술은 맛 경험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와 모임 금지 등 코로나로 인해 다양한 경험 행사를 진행하기 힘들어지면서 온라인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올해 처음 신제품 출시 시음 행사를 온라인으로 전환한 크루그는 ‘샴페인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최고급 샴페인. 단순한 애호를 넘어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 층을 거느린 샴페인이기도 하다. ‘크루기스트(Krugist)’는 브리태니커 사전에도 등재된, 크루그 마니아를 뜻하는 단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리아 칼라스, 코코 샤넬, 마돈나, 조르조 아르마니, 재클린 케네디, 엘턴 존 등이 이름 난 크루기스트들이다.
유명 인사들이 크루그 신도(信徒)를 자처하는 건 이 샴페인 브랜드가 맛과 품질에 쏟는 광적인 노력 때문이다. 포도를 밭보다 더 작은 구획(plot) 단위로 나눠 세밀하게 재배하고, 구획별로 수확한 포도를 작은 오크통 4000여 개에 따로 숙성시킨다.
이렇게 생산한 와인 300여 종을 크루그 가문 사람들과 와인 메이커들이 모여 맛보고 매일 5000여 개의 평가 노트를 작성해 이를 바탕으로 블렌딩, 샴페인을 만든 뒤, 최하 6년 숙성시켜 출시한다. 일반적인 샴페인 숙성 기간 1년 3개월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길다.
이토록 애정을 쏟아부어 생산한 샴페인을 매년 출시할 때마다 크루그는 전 세계 핵심 와인 관계자를 본사가 있는 랭스로 초청해 성대한 시음회를 열었다. 그러나 코로나 여파로 올해는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시음회 이틀 전 레드와인 색상의 커다란 상자 2개가 퀵서비스로 기자의 집에 배달됐다. 상자 하나에는 올해 새로 출시된 샴페인 1병과 비교 시음을 위해 이전 생산된 샴페인 3병 등 총 4병이 담겨 있었다. 또 다른 상자에는 오스트리아 명품 와인 잔 브랜드 리델(Riedel)에서 생산한 크루그 전용 잔 6개가 들어 있었다.
시음회 30분 전 책상에 놓여있던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에 잡힌 내 얼굴을 보니 너무 아래쪽에서 찍혀 턱살이 과장된 듯했다. 노트북을 고일 만한 물건을 찾았다. 와인 애호가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프랑스 라루스(Larousse) 출판사의 ‘그랑 라루스 와인백과’가 두께와 내용에서 이번 행사에 가장 어울리는 듯했다. 한 권으로는 아직 너무 낮아서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발간한 ‘그랑 라루스 요리백과’도 고였다. 그러고는 샴페인과 와인 잔, 수첩, 필기도구를 노트북 주변에 배치해 시음 준비를 마쳤다.
오후 3시 크루그에서 알려준 인터넷 주소에 접속해 인증 과정을 마치자 시음회가 시작됐다. 크루그 6대손의 환영 인사에 이어 샴페인 생산을 총괄하는 셀러마스터(cellar master) 줄리 카빌(Cavil)이 이번에 출시되는 샴페인을 랭스에서 실시간으로 설명했다. 이어 농부들이 자신이 생산한 포도 작황에 대해 설명하는 녹화 영상을 시청했다.
화면에 다시 카빌이 등장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샴페인을 따서 잔에 따라 시음하며 설명을 들었다. “이번 출시된 크루그는 2013년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 기본 뼈대를 이룹니다. 2013년은 샤르도네 포도 품종이 가진 잠재력과 표현력을 최대한 발현한 해였습니다….”
6대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셀러마스터, 포도 생산자 등 핵심 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으며 샴페인을 시음했다. 한두 차례 화면이 일시 정지하긴 했지만 크루그 온라인 시음회는 비교적 매끄럽게 90분 만에 끝났다.
코로나 발생 한참 전 크루그 본사에서 시음한 적이 있다. 그때보다 온라인으로 시음한 이번이 더 샴페인의 맛과 향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장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감동은 없었다. 체험의 폭과 깊이가 오프라인보다 얕고, 이로 인해 브랜드에 대해 쌓이는 데이터의 양이 적다고 할까. 여럿이 모여 시음할 때의 즐거움과 재미도 없었다.
진지한 ‘와인 인강(인터넷 강의)’ 같았다. 온라인 시음회가 코로나라는 비상 상황에서 임시 방편이 될 수는 있지만 완벽한 대체재가 되지는 못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