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35세 문학 평론가 이어령(1933~2022)은 조선일보 신설 코너 ‘문예 시평’ 첫 필자로 참여했다. 첫 글은 ‘누가 그 조종(弔鐘)을 울리는가? 오늘의 한국 문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는 제목이었다.
이어령은 시인 김수영이 사상계 1월호에 실은 글 ‘지식인의 참여’를 비판했다. 이어령은 “문화의 위기는 단순한 외부로부터 받는 위협과 그 구속력보다는, 자체 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문예의 조종은 언제나 문예인 스스로가 울려 왔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1968년 2월 20일 자 5면)고 지적했다.
“문화의 위기는 자유 속에 내던져지는 순간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때 문화인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또 다른 검열자’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자진해서 죽음의 바다로 뛰어드는 뱃사공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경우가 많다. 그 증거로 우리는 어느 진보적인 중견 시인 한 분이 해방 직후와 4·19 직후를 한국 문예의 황금기였다고 고백한 그 미신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어령은 “언론의 자유가 무한대였다는 해방 직후와 4·19 직후의 두 시기에선 아이러니컬하게도 몇 개의 격문과 몇 장의 삐라 같은 어휘밖에는 추려낼 것이 없을 것 같다”면서 “왜냐하면 관의 검열자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대중의 검열자가 몇 배나 더 문화인의 주체성과 그 창조적 상상력을 구속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탓”이라고 꼬집었다.
정치 권력이나 마찬가지로 열정에 사로잡힌 대중도 문화적 자유와 상상력을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어령은 문학에 이데올로기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이야말로 문화에 조종을 울리는 이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문화를 정치 수단의 일부로 생각하고 문학적 가치를 곧 정치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로 평가하는 오늘의 오도된 사회 참여론자들이야말로 스스로 예술 본래의 창조적 생명에 조종을 울리는 사람들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팥죽 한 그릇이 아쉬워 장자(長子)의 기업을 야곱에게 팔아버린 에서와 같이 지금 우리는 일시적인 사회의 효용성을 추구하려다가, 영원한 문예의 상속권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팔아넘기는 어리석음을 경계하여야 된다.”(1968년 2월 20일 자 5면)
이어령보다 12세 위인 김수영(1921~1968)은 즉각 반론했다. 그는 일주일 후 같은 지면에서 이어령의 견해를 “소아병적 단견” “독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두려워해야 할 ‘숨어 있는 검열자’는 그가 말하는 ‘대중의 검열자’라기보다도 획일주의가 강요하는 대제도(大制度)의 유형 무형의 문화 기관의 ‘에이전트’들의 검열인 것이다. (중략) 그는 두 개의 범죄를 다 같이 인정하는 듯한 가면을 쓰고 있을 뿐, 사실은 한쪽의 범죄만을 두둔하는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의 조종의 종지기는 유령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학에서는 ‘대중의 검열자’가 종을 칠 만한 힘이 없다. 그런 종지기를 떠받들어 놓고 누구를 장송하는 종을 쳤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1968년 2월 27일 자 5면)
둘의 논쟁은 한 차례 더 이어졌다. 글에는 서로 인신을 공격하는 표현도 있었다. 결국 3월 26일 자에 김수영과 이어령의 글을 동시에 싣는 것으로 지면에선 논쟁을 일단락했다. 제목은 ‘이어령씨와 김수영씨의 ‘자유’ 대 ‘불온’의 논쟁’이었다.
-김수영: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문화의 이치를 이어령씨 같은 평론가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오해를 고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 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이어령: “나의 시평은 그러한 비문화적 분위기를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한 비문화적 분위기가 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인 안에도 있다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었다. (중략) 그런데도 문학 논쟁을 하다가, 난데없이 기관원 운운하는 사람과 이제 더 무엇을 논할 수 있겠는가. 김수영씨의 건필을 빌 따름이다.”(1968년 3월 26일 자 5면)
논쟁은 지면 위 일단락과 관계없이 더 지속할 수 없었다. 김수영이 석 달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학생 시절부터 기성 문단의 권위에 도전했다. 김동리·염상섭·황순원·서정주 같은 선배 문인에게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뛰어난 필력으로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들’(1971), ‘축소 지향의 일본인’(1982), ‘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1984), ‘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1992), ‘디지로그’(2006), ‘가위바위보 문명론’(2015) 등 50년간 200여 권 책을 냈다. 현상 아래 깊은 곳에서 본질을 길어 올리는 문화·문명론적 저술을 다수 냈다.
2022년 부음 기사는 이어령이 만년에 남긴 말을 기록했다.
“최근 출간된 책 ‘메멘토 모리(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고인이 생전 즐겨 말하던 라틴어 낱말이었다. 그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란 말을 남겼다.”(2022년 2월 28일 자 A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