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3월 28일 바티칸 교황청은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1922~2009)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한국에 가톨릭이 전래된 1784년 이후 185년 만에 탄생한 첫 추기경이다. 동양인으로는 다섯 번째, 당시 만 47세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가톨릭교가 한국에 들어온지 만 185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인이 로마 교황 다음 가는 최고의 영예인 추기경이 됐다. 최초의 추기경이 된 김수환 대주교는 1946년 자유중국의 티엔 대주교(사망), 53년 인도 그라시아스, 60년 산토스(필리핀), 페터 다쓰오 도이(일본) 대주교에 이어 동양인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자유중국의 유핀 대주교와 함께 임명됐다.”(1969년 3월 30일 자 2면)
김수환 추기경은 1970~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종교 지도자를 넘어 ‘시대의 어른’ ‘민주화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선종 후 조선일보 사설은 “유신과 군사 쿠데타 등 이 나라 정치의 고비고비에서 추기경은 권력에 의해 입이 봉(封)해진 사람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소리에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집념과 열망을 실어 날랐다”고 평가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언하자 김 추기경은 TV로 생중계된 성탄 미사에서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이 땅의 평화에 해를 끼칠 것”이라며 성서 속 구약(舊約)의 예언자 모습으로 국민 곁을 지켜주었다. 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는 “물리적 힘으로만 유지되는 침묵과 죽음의 질서를 바탕으로 해서는 폭력의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라고 계엄령 해제, 유혈 사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국 담화를 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시민이 시위를 벌이던 명동성당에 경찰 투입이 임박하자 “나부터 잡아가라”고 팔을 내저어 가로막고 나섰다.”(2009년 2월 17일 자 A31면)
종교 자유를 말살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북 정권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88년 관훈 토론에선 일부 학생들의 친북 성향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김수환 추기경)는 급진 학생들의 좌경화 문제에 언급, “급진 학생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전제하고 “그럴수록 우리는 신념을 가지고 민주화를 추진해 나가야 하며, 학생들이 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그런 의미의 좌경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학생들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남북 학생 회담 등을 통해 북한을 다녀올 수 있게 하는 것도 한 방안”이라고 말하고 “이상론이지만 공산주의에 빠진 학생들이 있다면 북에 보내 한 달쯤 살게 해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1988년 8월 19일 자 1면)
김수환 추기경은 1970~1980년대 여러 차례 조선일보 인터뷰를 통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정치는 도의 떠나선 안 돼/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치관은 서 있어야’(1975년 9월 2일 자 3면)
‘참된 자유는 진실 속에서/ 나와 이웃에 성실할 때 自信이/ 하느님의 이상이 이 땅에 실현될 수 없다고 좌절해서야 되겠는가’(1978년 2월 26일 자 3면)
‘뚜렷한 사명감 갖고 인간 회복을/ 종교는 ‘참’ 일깨워 줘야/ 정의·진리 존중되는 사회가 우리의 과제/ 순교 자세로 오늘의 난제 타개’(1980년 12월 21일 자 4면)
‘교회는 가난의 모습을 지녀야/ 구원은 인간 존엄성 회복하는 것/ 복음화 안 된 양적 팽창 지탄 마땅’(1983년 12월 31일 자 3면)
‘마음을 비우면 모두가 얻고 이긴다/ 진정한 민주화 중요… 권력 구조는 다음/ 새해엔 가난한 사람 고통 없애는 정치를’(1986년 12월 24일 자 3면)
김수환 추기경의 말은 이념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주화 이후 일부 좌파 성향 인사와 매체는 김수환 추기경을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이날 칼럼니스트 손석춘(한겨레 논설위원)씨의 ‘추기경의 근심, 백성의 걱정’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다”고 주장했다. 이 칼럼은 김 추기경이 지난달 29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일행이 취임 인사차 서울 혜화동 성당을 예방한 자리에서 남북 문제 등 국정 전반과 관권 선거 논란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요즘 감정적 반미가 많아졌는데, 반미 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전체적으로 그런 식으로 이끌어지면 우리 미래는 어떻게 되나 걱정된다”고 말한 것 등을 문제 삼았다.
오마이뉴스는 이 칼럼에서 “김 추기경은 원로가 드문 한국 사회에서 노상 ‘원로’로 꼽혀왔다”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서울 명동성당이 지닌 상징성-언젠가부터 시나브로 빛바래가고 있지만-과 추기경이라는 ‘권위’가 이어졌기에 더욱 그랬다”고 말했다.”(2004년 2월 2일 자 A2면)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에 육신을 남기고 하늘로 떠날 때까지도 사랑을 실천했다. 선종 후 양쪽 눈 각막을 기증해 두 사람에게 빛을 선물했다.
“16일 오후 6시 30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옛 강남성모병원) 병실에 이 병원 안과 전문의 4명이 찾아왔다. 지난 1990년 김 추기경이 약속한 각막 기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중략) 변용수(30) 전문의는 “야위셨지만, 돌아가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평안한 표정이셨다”고 했다. 수술은 오후 7시부터 30분 동안 진행됐다. 의사들은 추기경의 양쪽 눈을 거둔 뒤 병원 안에 있는 ‘안구은행’으로 옮겨서 이식에 적합한 상태인지 확인했다. 변 전문의는 “연세에 비해 각막이 깨끗했고, 두께와 세포 밀도도 정상이었다”고 했다. 이날 밤 9시 30분쯤 김 추기경의 유해는 명동성당으로 운구됐고, 김 추기경의 각막은 병원에 남았다. 이튿날인 17일 오전 9시쯤 각막 이식 수술 대기자인 서울의 A(73)씨와 경북의 B(70)씨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각막이 준비됐으니 빨리 서울성모병원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2009년 2월 18일 자 A1면)
평소 자주 하던 “고맙습니다, 사랑하세요”라는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됐다. 선종부터 장례 미사까지 ‘추기경 선종’ 관련 기사는 연일 2~3개 면에 걸쳐 실렸다.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에는 나흘간 시민 40만명이 조문했다. 자원봉사자 3200명이 교대로 근무하며 조문객을 안내하고, 근조 리본을 나눠주고, 쓰레기를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