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치환. 1930년.

시인 유치환(1908~1967)은 1967년 2월 13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부고 기사에 따르면 이날 밤 9시 30분쯤 부산 좌천동 미성극장 앞길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숨졌다. 당시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재직 중으로 늦은 시간 퇴근하던 길이었다.

유치환 1966년 신년시. 1월 1일자 5면.

유치환은 별세 1년 전인 1966년 1월 1일 조선일보에 신년 기념 시를 썼다. ‘안개 걷히는 현해탄(玄海灘)’ ‘하늘에서 본 한국해협… 저기 아스라이 대마도가…’라는 기사에 부친 시였다.

공군 T-33기를 타고 3만5000피트(약 10.6㎞) 상공에서 부산 영도와 낙동강, 바다 건너 대마도가 보이도록 찍은 대형 사진 아래 시가 실렸다. 제목은 ‘저 은수(恩讐)의 지호(指呼)에 있는 자(者)’. ‘은수(恩讐)’란 은혜와 원한, ‘지호(指呼)’는 ‘손짓으로 부르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1965년 한일 수교 후 처음 맞는 새해라는 시기를 감안해 기획한 지면이었다.

여기는

아세아 노대륙(老大陸) 동녘

조용한 아침 나라, 적은 반도를 부각하여

저 이오니아 바다보다 푸르고 고운 동해의 남쪽 물목

오늘도 눈을 들어 바라보노니

창망히 넘실대는 먼 물길 끝

운하(雲霞) 아득히 걸려 있고

그 아래 지호(指呼)에

하마 잡힐 듯 밀려 있는 한 그리매여

그것은

나와 부즉불리(不卽不離) 운명을 차지한 자리

이 날로 나의 은수(恩讐)의 어귀에만 있어

이 물길을 통하여 내

슬기와 정의(情誼)를 보냈고

횡악의 갚음을 받음으로 써

어젯날까지만도

그 얼마나 모진 곤욕의 핏자국을 입었음이랴

(하략)

유치환은 조선일보에 자주 시와 글을 실었다. 해방 20년을 맞은 1965년 8월 17일 자에 쓴 시론 ‘해방 20년 맞은 한 시인의 자책/ 높은 윤리의 결핍’에서 “인간으로서의 높고 가열한 윤리의 부족”을 질타했다.

1956년엔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울릉도 시초(詩抄)’ 연작시를 실었다. 마지막 5회째 시 제목은 ‘독도여’였다. 1954년 11월 우리 독도의용수비대가 일본 순시선을 격퇴한 ‘독도 대첩’ 이후에도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제안 등 도발을 지속하고 있었다.

1956년 9월 5일자 4면.

무슨 저주가

이 같은 절해에 너를 있게 하였던가.

종시 청맹 같은 세월과

풍랑의 허망에 깎이고 찢기어

한 포기 푸새도 생명하기 힘겨운

독올(禿兀) 불모한 암석만의 편토

다시 갈 곳 없으매

갈매기도 마침내 해골을 바래(曝)는 곳.

그러나 진정 너의 욕(辱) 됨은

이 유찬(流竄)의 고절(孤絕)에 있음이 아니거니

제 모국에서 분노(忿怒)가 오늘처럼 치밀 제는

차라리 너 되어 이 절해(絕海)에 이름 견디고저.

유치환 시 '폐리'. 1933년 2월 8일자 4면.
유치환 시 '벽'. 1933년 2월 16일자 4면.

유치환은 23세 때인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3년 조선일보엔 그의 시가 잇달아 실렸다. ‘폐리(廢履)’(2월 8일 자), ‘벽’(2월 16일 자), ‘무제’(3월 1일 자), ‘돌’(10월 24일 자) 등이다. 1940년 낸 첫 시집 ‘청마시초’도 주목을 받았다. 이육사의 동생으로 문학평론가이자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인 이원조가 서평을 썼다.

1940년 8월 평론가 최재서는 유치환을 1세대, 2세대 시인을 잇는 신세대 시인으로 분류했다. 최재서는 1세대 시인으로 안서(김억), 파인(김동환), 월탄(박종화), 주요한을 꼽았다. 2세대는 정지용, 임화, 김기림, 김구섭, 김상용, 김태오, 김동명, 백석, 모윤숙, 신석정이었다. 3세대인 신세대는 유치환, 이찬, 김광균, 윤곤강, 장만영, 임학수, 노천명, 서정주, 이용악, 오장환이었다. 최재서는 “유치환의 철학적인 시는 ‘페단틱’(*현학적인) 하다고 해서 일시는 조소를 받더니 요새 같아서는 ‘메타피지칼’(*형이상학적) 시인으로서 성공할 소질이 충분한 것을 보여주었고…”(1940년 8월 5일 자 4면)라고 평했다.

1940년 8월 5일자 4면.

‘신세대’였던 유치환은 1954년 첫 예술원 회원, 1957년 발족한 한국시인협회 대표 간사와 회장, 1962년 예술원 공로상을 받는 ‘원로’로 성장했다. 1964년 열한 번째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냈을 때 후배 시인 신동문은 유치환에 대해 “이순(耳順)이 되고도 미루나무를 보고 ‘너울너울 하늘로 용트림하고 오르는 사랑의 불기둥’이라고 실감할 수 있는 그 밋밋한 시정신이 너무나 부럽고 미덥다”(1964년 12월 15일 자 5면)고 했다.

1967년 2월 15일자 3면.

부음 기사는 유치환 시의 한 이미지(정확한 구절과는 다르다)를 마지막 문장으로 썼다.

“비보가 들려온 14일 그를 아끼던 동료 문인들은 청마의 ‘작약꽃 이울 무렵’의 한 귀절을 외며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꽃은 피고 지고 어느 왕국이 무너진들 이보다 아플소냐’고-.”(1967년 2월 15일자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