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관북리 유적의 구덩이 바닥에서 드러난 백제 관악기 횡적. 부러진 채 납작하게 눌린 상태로 발견됐다.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백제의 소리’가 1400년 잠에서 깨어났다. 백제 사비(현재의 부여) 시대 왕궁 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관악기 횡적(橫笛)이 발견됐다. 오늘날의 소금과 닮은 이 악기는 가로로 불어 연주하는 형태로, 문헌으로 전하던 백제 횡적의 실체가 확인된 건 처음이다. 삼국시대를 통틀어 관악기 실물이 발견된 첫 사례이자, 국내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목관악기다.

백제 목관악기 횡적 재현품을 소금 연주자 김윤희씨가 연주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지난 2024~2025년 진행한 관북리 유적 16차 발굴 조사에서 백제 횡적 1점과 목간(木簡) 329점이 출토됐다”며 5일 실물을 공개했다. 횡적은 7세기 건물로 추정되는 조당(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의하고 의례를 거행하는 공간) 인근의 직사각형 구덩이(가로 2m, 세로 1m, 깊이 2m)에서 나왔다. 대나무 소재로 4개의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고, 부러진 채 납작하게 눌린 상태였다. 잔존 길이 22.4㎝.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추정 연대는 568~642년으로 나타났다. 연구소는 “엑스레이 분석 결과 입김을 불어넣는 구멍(취공·吹孔)이 있는 한쪽 끝이 막힌 구조”라며 “백제 금동대향로에 조각된 종적(세로 관악기)이 아닌 가로로 부는 악기”라고 했다.

5일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에서 공개된 백제 횡적. 잔존 길이 22.4cm. 부러진 채 30%는 사라진 상태로 발견됐다. /국가유산청

특이한 건 악기가 발견된 장소. 구덩이 내부의 유기물에서 기생충 알이 무더기로 검출돼 건물에 부속된 화장실로 추정된다. 궁중 악사가 실수로 떨어뜨린 걸까, 스스로 부러뜨리고 버린 걸까. 1400년 전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든다. 황인호 소장은 “익산 왕궁리 유적 화장실터에서 출토된 용변 뒤처리용 나무 막대와 똑같은 나무 막대도 나왔다”며 “악기는 인위적으로 부러뜨린 것으로 보이는데, 왜 화장실에서 나왔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고 했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횡적 재현품.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발굴된 목간 329점은 국내 단일 유적에서 확인된 목간 중 가장 많은 수량이다. 약 20m 길이의 수로 안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다. 구체적으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목간도 있었다. ‘경신년(庚申年)’은 540년, ‘계해년(癸亥年)’은 543년을 나타내며, 이는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538년 직후의 시기라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주로 인사 기록, 재정 운영, 관등·관직이 적혀 있는 ‘공문서’로 당시 국가 운영과 통치 체제를 엿볼 수 있다.

'경신년'(540)과 '계해년(543)이 적힌 목간.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인사 관리 목간.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예를 들어 길이 28.3㎝에 달하는 목간에는 ‘공적이 4개인 도족이를 소장군으로 삼다(功四爲小將軍刀足二)’라고 적혀 있어 인사 관련 문서로 해석된다. 월 단위의 식량을 기록한 장부 목간, 사비 도성의 중앙 행정 구역인 5부(部), 6세기 지방 행정 체계의 재편 과정을 보여주는 목간도 다수 출토됐다.

연구소는 “1500년 전 백제의 국가 운영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문서 행정 실태, 그리고 당시의 음악 문화와 소리 복원에 기여할 악기 실물 자료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굴 성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