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명인 황병기(1936~2018) /이진한 기자

가야금 연주가·작곡가 황병기(1936~2018)는 취미를 본업으로 바꿨다. 경기중 2학년 때인 1950년 부산 피란 때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었다. 대신동 천막 피란 학교 가는 길 일본식 건물 2층에서 김철옥이라는 노인이 타는 가야금 소리에 매료됐다.

중학생 황병기가 가야금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온 집안이 들고일어났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등 온 집안 식구가 반대했다. 왜 궁벽스럽게 그 고리타분한 것을 배우려느냐,학교 공부에도 시간이 없는데,더구나 이 전쟁 판에 가야금 배워 신세 망치고 싶으냐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 공부에 아무 지장이 없게끔 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아인슈타인 박사 같은 위대한 인물도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한사코 우겨댔다.”(1999년 12월 16일 자 23면)

1999년 12월 16일자 23면.

황병기는 1955년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약속을 지킨 덕분에 이후 가야금에 더 정진할 수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대학 졸업하는 해인 1959년 서울대 음대에 국악과가 생겨 강사로 출강도 했다.

황병기는 1964년 1월 조선일보에 ‘국악 작곡계의 기수’로 소개됐다. 아내인 소설가 한말숙과 함께 지면에 실렸다. ‘스위트홈과 내조’라는 시리즈 기사 중 하나였다.

1964년 1월 8일자 5면.

“스스로도 가야금의 프로요, 또 본업은 소설가라 이름하는 아내(한말숙·30)가 젊은 국악계의 기수인 남편(황병기·27)을 받들어 푸짐한 ‘스위트 홈’을 꾸려가고 있다. (중략) 취미로 배운 가야금이 법대(서울법대)를 졸업한 후 본업이 된 황씨는 교편을 잡던 서울음대를 그만두고 지금은 국립국악원에서 국악사 양성에 힘쓰고 있다.”(1964년 1월 8일 자 5면)

한말숙은 황병기보다 다섯 살 연상이지만 위 기사에서는 세 살 연상으로 표기됐다. 아내가 연상인 부부가 흔치 않은 때였기에 다섯 살 연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던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7년 9월 21일자 5면.

1965년엔 하와이 20세기 음악제에 초청받아 교향악단과 가야금 협연을 했다. 이해 국립국악원 국악상도 받았다. 하지만 2남 1녀 자녀를 둔 가장이 가야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황병기는 매일 가야금 연습을 하면서도 명동극장 지배인, 화학 회사,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사, 출판사 사장 등 생업을 이어갔다.

국악을 ‘본업’으로 할 수 있는 계기는 38세 때인 1974년 찾아왔다. 이화여대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 전임 초빙을 받았다. 창작곡 발표가 활발해졌다. 1963년 첫 가야금 독주곡 ‘숲’을 작곡했던 황병기는 이화여대 교수 재직 이후 ‘침향무’(1974), ‘미궁’(1975), ‘밤의 소리’(1985), ‘춘설’(1991), ‘달하 노피곰’(2001) 등 창작곡을 발표했다.

1995년 8월 14일자 15면.

1995년엔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를 완성했다.

“가야금 연주가며 작곡가인 황병기 교수(이화여대)가 최근 ‘황병기류 가야금 산조’를 완성,현존하는 가야금 산조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1950년 월북,북한에서 공훈배우 인민배우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지낸 가야금 산조의 명인 정남희(丁南希·1905~1984년) 가락에 바탕을 둔 그의 산조는 창작과 전통을 두루 오가며 무르익은 40여년 가야금 인생이 총 집결된 기악곡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1995년 8월 14일 자 15면)

황병기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정확히는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라고 해야 맞습니다. 정남희 선생의 수제자인 김윤덕 선생이 저의 직계 스승이셨으니까요. 그동안 고음반 등을 통해 꾸준히 수집한 정남희 선생의 가락에 내 나름대로 창작하거나 재해석한 가락들을 합쳐 한 편의 산조로 정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2018년 2월 1일자 A21면.

별세 3년 전 아내 한말숙과 함께 천주교에 귀의했다.

“다섯 살 연상인 소설가 한말숙과 결혼해 55년 해로한 그는 2015년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세례 성사를 받아 화제가 됐다. 무신론자였던 황병기는 아내에게 “이봐,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우리 같이 천국 가서 만나야지”라고 말해 나란히 천주교 신자가 됐다.”(2018년 2월 1일 자 A21면)

가수 김수철은 “전통 음악의 보존을 중시하는 국악계에서 창작, 그것도 실험적인 작곡을 했던 황 선생을 곱게 보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국악 하는 젊은이들에게 선생은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자 용기가 됐다”면서 “금기(禁忌)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영원한 청년”이라고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