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때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19세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지휘했던 악단이 KBS교향악단입니다.”
KBS교향악단 음악 감독에 선임된 지휘자 정명훈(72)이 웃으며 말했다.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간담회 자리였다. 실제로 정 감독은 1972년 KBS교향악단의 전신(前身)인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하며 ‘10대 지휘자’로 주목받았다. 누나인 첼리스트 정명화(81)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당시 협연자였다.
2년 뒤인 1974년 정 감독은 구(舊) 소련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2위 입상하면서 피아니스트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 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부지휘자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 활동에 나섰다. KBS교향악단은 10대 시절 그에게 ‘지휘의 꿈’을 심어준 악단인 셈이다.
올 들어 정 감독은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 5월 이탈리아 오페라 명문인 라 스칼라 극장의 동양인 첫 음악 감독으로 선임된 데 이어서 최근 KBS교향악단 감독에 임명됐다. 지난 2015년 서울시향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음악 감독직을 모두 내려놓은 뒤 10년간 감독 직책 없이 활동하다가 한국과 유럽 음악계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음악 감독은 연주 곡목과 협연자 선정부터 단원 선발까지 악단의 음악적 부문을 총괄하는 자리다. 정 감독은 1998년에도 KBS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를 지냈기 때문에 28년 만의 ‘친정 복귀’가 된다.
이날 그는 서울시향 감독 시절(2006~2015년)과 이번 KBS교향악단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20여 년 전에 서울시향을 처음 맡았을 때는 올림픽에 나갈 팀을 만드는 것처럼 목표가 분명했다면, 지금은 그럴 시기는 지났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단원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이라고 했다. 이승환 KBS교향악단 사장은 “이번 감독 선임은 내년 악단 창단 70주년을 맞아서 중요한 음악적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 감독의 삶을 양분할 때 절반에 해당하는 36세에 프랑스 명문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엔 불어(佛語)도 제대로 못 했고 프랑스 오페라를 지휘한 경험도 없었으니 너무 이른 시기였다. 단지 젊은 에너지와 ‘모두 이겨내겠지’라는 한국인의 근성이 있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반대로 지금은 책임이나 감독을 맡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라 스칼라와 KBS교향악단의 제안은 거절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내년 창단 70주년을 맞는 KBS교향악단과는 말러 교향곡 4번(10월 2일)과 교향곡 5번(3월 13일) 등을 지휘할 예정. 내년 4월 18일에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도 연출·무대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한다. 정 감독은 “예순이 되니까 단원들이 대부분 젊고 저도 공부와 경험이 쌓이면서 비로소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서 “칠순이 넘으니 이젠 단원들에게도 ‘모든 실수는 지휘자에게 책임이 있으니 마음 놓고 연주하라’고 주문한다”고 했다. 흡사 공자의 이순(耳順·예순)과 종심(從心·칠순)의 음악적 비유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