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4차 발사가 성공했다. 우주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며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정작 그날 유튜브 생중계를 지켜보던 내 눈길을 끈 건 채팅창이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취업 성공 기원”, “로또 1등” 같은 간절한 소원들이 빗발쳤다. 이공계 지인은 혀를 찼다. 과학기술과 공학의 결정체인 로켓을 보고 기복(祈福) 행위를 하다니, 이게 동시대 일이 맞냐는 것이다.
지인의 분개도 이해는 가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다. 문화인류학자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는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에서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의례(ritual)가 인간의 불안감을 낮추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불확실성 앞에서 기도를 올리거나, 징크스를 지키는 행위가 실제로 뇌의 불안 수준을 낮추고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비이성적 행동이라 여겨지는 의례의 기능이 되레 과학을 통해 밝혀진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피면, 현대인이 유독 불안을 크게 느끼게 된 것도 과학의 발달과 의례의 쇠퇴 때문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과거엔 ‘공기가 좀 나쁜가 보다’ 여겼던 미세먼지도 구체적 수치로 오염도가 나오고, 맑은 생수 속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둥둥 떠다니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도 해법은 없으니, 세상이 점점 더 불안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과학 발전이 만든 새로운 유형의 불안이다.
물론 과학적으로야 ‘극미량’이라 인체에 영향이 미미할 테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원적 인지는 정량적이라기보단 정성적이다. 누가 수영장 물에 침을 뱉었다고 수영을 못 할 정도로 오염이 심해지진 않겠지만, 그때부턴 그 물은 ‘침 뱉은 물’이 된다. 과거엔 이런 오염을 씻김굿과 같은 정화(淨化) 의례로 제거했지만, 지금은 그런 의식 자체가 망실됐다. 그러니 머리로는 괜찮다는 걸 알지만, 가슴엔 찝찝함이 남는 삶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불안이 사라지기 어렵다.
그러니 누리호 채팅창에 소원 좀 빈다고 도끼눈을 뜨진 말자. 로켓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 건 과학의 힘이지만, 우리 마음속의 불안을 쏘아 보내는 건 여전히 의례의 몫이다. 최첨단 로켓에 소원을 비는 모순적인 모습이야말로, 불안한 시대를 건너는 인간의 생존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