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초 63세 상하이 당서기 장쩌민(江澤民·1926~2022)은 은퇴를 생각했다. 다음 인사 때는 전인대 상무부위원장(국회부의장 격)쯤으로 이동할 것 같았다. 허울 좋지만 실권은 없는 자리다. 정작 본인은 모교 상하이교통대 교수로 후배 양성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운명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해 5월 29일 당 중앙서기처에서 즉각 베이징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장쩌민은 베이징 외곽 시산(西山) 별장에서 최고 실력자인 덩샤오핑을 만났다. “당 총서기직을 자네가 맡게.” 중국 정치의 최고위직이었다.
장쩌민은 훗날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다 깊숙이 가라 앉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장쩌민은 거듭 사양했다. “저에게 총서기를 맡기시면 소학생(초등학생)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덩샤오핑은 단호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해야한다.”
베이징 톈안먼 시위가 격렬하던 때였다. 덩샤오핑은 앞서 5월 20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천윈(陳雲),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리셴넨(李先念)과 의견을 모았다. ‘중난하이의 3거두’로 불리는 셋이다. 중난하이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 등 최고위 집무실이 모여있는 중국 정치의 심장부다. 세 원로는 시위대에 동정적인 자오즈양(趙紫陽) 총서기를 믿지 못했다. 덩은 강경 진압을 결심하고 후임을 물색했다.
리셴넨이 장쩌민을 추천했다. “이름도 좋잖아요? 마오쩌둥(毛澤東)의 ‘쩌둥’이 ‘동방을 구한다’는 뜻이듯 ‘쩌민(澤民)’도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니까요.” 천윈도 동의했다.(2009년 3월3일자 A14면, 2011년 9월 10일자 B6면)
장쩌민 발탁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당 정치국원이자 상하이 당서기였지만 베이징 중앙 정계에선 전혀 유력 인물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 총서기로 선출됐을 때 리셴넨의 사위(1989년 6월 25일자 5면)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으로부터 군 최고 책임자인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도 물려받고, 1993년부터 10년간 국가 최고 지도자인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재임했다. 당·정·군을 모두 장악한 명실상부한 중국 최고 권력자였다.
장쩌민은 전기과를 졸업한 공학도지만 시와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피아노와 기타, 중국 전통 현악기인 얼후를 연주할 줄 알았다. 영어·러시아어·루마니아어에 능통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통째로 외웠다. 1996년 필리핀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때 클린턴 앞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러브 미 텐더’를 불러 톈안먼 강경 진압 이미지를 부드럽게 바꾸기도 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장쩌민 집권기인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수교했다. 중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 방문했다. 1995년 11월 13일부터 5일간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했다.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행원들에게 “한국은 나라도 작고 인구도 적고 자원도 없지만 30년의 짧은 세월 동안 이 같은 수준까지 발전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며 “오늘 이후 우리가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2022년 12월 1일자 A14면)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을 이어 시장 경제 정착에 본격 힘을 쏟았다. 당 총서기에 올랐던 1989년 1조6922억위안이었던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군사위 주석에서 퇴임할 때인 2004년 10배로 커졌다. 미국에 도전하는 ‘G2’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다.
장쩌민은 잘 웃고 친화력이 좋아 ‘하오하오(好好) 선생’이란 별명이 있었다. 시골집 아무 곳이나 들어가 주민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권력 투쟁에서는 호인(好人)이 아니었다. 당 총서기 취임 초기 베이징 중앙 정계의 숱한 견제를 뚫고 상하이 인맥을 주요 자리에 앉히며 권력을 강화했다. 후임 후진타오 시대에도 군권을 2년 더 쥐고 막후 실력자로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다.
시진핑 집권 시기 장쩌민 세력 ‘상하이방’은 급격히 몰락했다. 시진핑은 ‘반(反)부패’를 내세워 장쩌민 군부 인맥을 숙청하고 상하이방 출신을 제거하면서 1인 체제를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