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1917~1963) 재임 기간은 2년 10개월에 불과했다. 1961년 1월 20일 취임해 1963년 11월 22일 총격 피살로 삶을 마감했다.
케네디가 당선하고 취임했을 때 한국은 내각제 총리 장면, 대통령 윤보선이었다. 취임식엔 장면 정권이 임명한 주미 대사 장이욱이 파견됐다.
취임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케네디가 장면을 7월 초쯤 워싱턴으로 초청해 4·19 이후 정세를 논의할 것이란 소식(1961년 2월 25일 자)이 전해졌다. 케네디는 4·19 1주년을 하루 앞두고 기념 성명도 냈다. 4·19로 등장한 장면 정권에 대한 지지로 해석됐다.
“이 중요한 날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와 한국민에게 인사를 보내고자 하며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진보라는 대의에 대해 그들의 헌신을 그다지도 용감하게 과시한 바 있는 한국민에 대해 미국민들이 가슴속에 지니는 존경과 감탄을 표시하고자 한다.”(1961년 4월 19일 자 1면)
1961년 5월 16일 한국에서 군사 정변이 일어났다.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였다. 이날 조선일보 석간 1면 제목은 긴박했다. ‘군부 쿠데타 군사혁명위 조직을 발표’ ‘16일 새벽 돌연 행동’ ‘부패 무능한 장 정권 불신’ ‘전국에 비상 계엄령’ ‘장 총리 행방 감춰’….
케네디는 그날 캐나다 방문을 앞두고 있었다. 한국의 긴급 사태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 보고 청취, 미국 태도 아직 불명’(1961년 5월 18일 자 1면)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후에도 한국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소련과 서베를린을 놓고 긴장이 높아지고 있던 때였다. 케네디는 유럽을 방문해 프랑스 대통령 드골과 공동 성명 발표(1961년 6월 3일 자 1면), 오스트리아 빈에서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와 회담(6월 4일 자 1면), 영국 총리 맥밀런과 회담(6월 5일 자 1면) 등 ‘베를린 위기’에 대처하는 바쁜 일정을 이어갔다. 케네디는 서베를린 수호를 위해 군비 증강 등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7월 26일 케네디에게 ‘베를린 강경책’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케네디의 지지를 구하는 행동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각하. 백림(베를린) 사태에 대한 각하의 명확한 미국 정책의 천명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특히 각하의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전 세계적 방위에 언급한 점을 환영합니다. 우리 역시 평화를 희망하는 바이나 만일에 우리에게 전쟁이 강요된다면 대한민국은 미국과 더불어 제일 먼저 투쟁할 동맹국이 될 것입니다.”(1961년 7월 27일 자 1면)
케네디는 한동안 박정희를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케네디는 5·16 후 첫 광복절인 1961년 8월 15일 박정희 의장이 아닌 윤보선 대통령을 수취인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모든 나라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케네디는 5·16 후 4개월 가까이 지난 9월 12일 워싱턴에서 두 달 후 회담을 갖자고 박정희를 초청했다.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가 한국의 실력자로 떠오른 박정희 초청을 케네디에게 건의했다. 케네디는 박정희와 11월 15일(이하 한국 시각) 새벽 3시와 5시 15분 회담하고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원조를 약속하고, 1963년 여름까지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박정희의 약속에 만족을 나타냈다.(1961년 11월 15일 자 1면)
케네디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박정희에게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라고 촉구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넘긴 케네디는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을 4년 더 연장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한국에 민주 정부가 부활하는 것을 고대한다”(1963년 3월 23일 자 1면)며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4월에는 박정희에게 서한을 보내 “예정대로 민정 이양을 실천할 것”(1963년 4월 3일 자 1면)을 촉구했다.
박정희는 4월 8일 군정 연장 국민투표를 보류했다. 이어 대통령 직선제 일정을 진행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박정희는 10월 15일 열린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서 46.6% 득표로 45.1%를 얻은 윤보선 민정당 후보를 1.5%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당선했다.
케네디는 박정희 당선에 대해 공식 언급을 하지 않았다.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을까? 느닷없이 주한 미군 감축 카드를 꺼냈다. 케네디는 10월 31일 기자회견에서 “주한 미군 감축을 정세에 따라 결정할 것”(1963년 11월 2일 자 2면)이라고 밝혔다.
20여 일 후 운명의 날이 오리라고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현지 시각)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무개차를 타고 유세 퍼레이드 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란 대사건이었다. 조선일보는 8개 면 중 7개 면에 걸쳐 관련 소식을 전했다.
장례식은 11월 25일 열렸다. 당시 신문 1면 메인 제목은 ‘하늘도 땅도 다시 흐느끼는 속에…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 엄수’였다. 왼쪽 아래 박스 기사에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희 사진이 실렸다. 제목은 ‘오늘 존슨 대통령과 회담/ 박(정희) 의장, 어제 화부(華府·워싱턴) 착(着)’이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케네디 장례식에 참석한 박정희를 만나 “민간 통치로 이양하겠다는 군사 정부의 약속이 이행되고 최근 한국의 선거가 절제된 상황에서 실시되어 기쁘다”(FRUS 1961~1963)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