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1966년 9월 24일 밤 11시 15분, 전(前) 국회의원 김두한(1918~1972)은 전격 구속됐다. 앞서 이날 오후 1시쯤 의원직을 사퇴했다. 김두한은 서울교도소 문으로 들어가며 “형무소는 나의 별장이다. 이번이 45번째 교도소 행”(1966년 9월 25일자 7면)이라고 자랑했다. 1월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무죄로 석방된 지 8개월만이었다.

김두한은 이틀 전 국회에서 오물(인분)을 투척해 ‘형법 138조 국회의장(議場) 모욕’에 저촉됐다. 삼성 계열사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단이었다. 정부 비호 아래 벌인 일이란 의혹이 일고 있었다.

한독당을 탈당해 무소속이 된 김두한은 9월 2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오후 12시 45분 발언권을 얻었다. 국무위원석에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경제기획원, 김정렬 재무, 민복기 법무, 박충훈 상공 장관이 앉아 있었다.

김두한, 45번째 교도소행. 1966년 9월 25일자 7면.

김두한은 마분지로 만든 상자를 가지고 단상에 올라갔다. 그는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주로 행동에 옮기기를 잘한다”고 말했다. 오후 1시 5분쯤 상자를 들고 국무위원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가 외쳤다.

“불의와 부정을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 장관들은 피고다. 이건 국민들이 주는 사카린이니 골고루 나눠먹어라!”

당시 신문은 이렇게 기록했다.

“고함을 지른 그는 느닷없이 상자 안에 든 물통 같은 깡통을 번쩍 들어 각료석에 퍼부었다. 사카린 아닌 시커먼 오물(인분)이 쏟아져 나왔고 정 총리, 장 기획, 김 재무, 민 법무, 박 상공 등은 오물 세례를 받아 양복이 흠뻑 젖었다.”(1966년 9월 23일자 3면)

드라마 '야인 시대' 주인공 김두한 역을 맡은 안재모, 김영철. 2001년 11월 23일자.

김두한은 ‘주먹’으로 유명했다. 식민지 시기 종로에서 조선인 청년 깡패들의 보스로 활동했다. 청산리 전투를 이끈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긍지가 있었다.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협객’이란 평가도 받았다.

해방 후 이승만·김구·김규식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한 대한민주청년동맹 감찰부장으로 활동했다. 앞서 좌익 편에 가담했지만 “너의 부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가 공산당원인 걸 알지 않느냐”는 지인의 훈계를 듣고 우익으로 돌아섰다.

좌익 계열이 벌이는 폭력 사태를 폭력으로 진압하며 명성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김두한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김두한을 사면했다.

김두한은 ‘의로운 협객’의 모습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 때 부친 김좌진 장군이 건국공로훈장을 받아 나오는 연금을 의정부 한 고아원에 기탁한 것도 한 사례다.

김두한 별세. 1972년 11월 22일자 7면.

딸 김을동은 장례식날 아버지의 영구차가 의정부를 지날 때 고아원 아이들이 소반에 제물을 마련하고 노제를 지내려고 기다리던 모습을 회고했다.

“고아원 원장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그 아이들이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모른다.”(2004년 7월 1일자 A29면)

영화·드라마에서도 ‘의로운 주먹’으로 묘사된다.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은 1990년 68만 관객 동원으로 당시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3편까지 나오며 흥행을 이어갔다. 김두한 일대기를 다룬 SBS 드라마 ‘야인 시대’는 2002년 7월부터 1년 2개월간 124회 방영하며 평균 시청률 40%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김두한은 1954년 서울 종로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3대 민의원에 당선했다. 1965년 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재선 의원이 됐다. ‘오물 투척’ 사건 후 정계를 떠났다. 이후 광업회사 대표 등을 지냈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01년 12월 29일자 29면.

딸 김을동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 비례대표로 당선했다. 헌정 사상 첫 부녀 국회의원이었다. 김을동은 2012년 서울 송파병에서 당선해 아버지처럼 재선 의원을 기록했다.

김두한이 사망했을 때 부음 기사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민족지도자들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는데 자금 부족으로 허덕이자 일제 하에서 재산을 모은 서울 장안의 유수한 부호들을 찾아가 주먹을 휘둘러 자금을 거둔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중략) 무소속으로 정계 생활을 해왔으나 옳은 일이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지지하던 고지식한 인간이었다.”(1972년 11월 22일자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