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총리 헬무트 슈미트.

1974년 5월 16일 서독 재무장관 헬무트 슈미트(1918~2015)가 총리에 취임했다. 전임 총리 빌리 브란트는 비서가 동독 간첩으로 드러나 전격 사임했다. 당시 발표는 없었지만 훗날 브란트가 저지른 ‘섹스 스캔들’이란 속사정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슈미트는 이후 8년 4개월간 총리로 재임하며 사회민주당 정권을 이어갔다. 당시 서방 최장수 정치 지도자였다.

위기가 없지 않았다. 1976년엔 1표 차이로 가까스로 당선했다. 1977년 5월 총리실 여비서가 동독 간첩으로 드러나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80년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2년 뒤인 1982년 10월 연방의회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불신임 퇴임은 역대 총리 중 처음이었다.

슈미트는 가장 존경받는 독일 총리 순위에서 지금도 1·2위를 오르내린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불안한 재출범. 1976년 12월 17일자.

그의 리더십은 1977년 10월 13일 서독의 극좌파 무장 단체 적군파(RAF)가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한 사건 때 빛을 발했다. 적군파 테러리스트 4명은 기장을 살해하고 소말리아로 기수를 돌렸다. 서독 정부에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슈미트는 이를 거부하고 특수부대를 비밀리에 전격 투입했다. 실패하면 정권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납치 108시간 만에 테러리스트 4명을 사살하고 승객·승무원 86명을 무사히 구출했다.

슈미트는 좌파인 사회민주당 출신 총리이지만 국가 안보에선 뚝심 있는 리더십을 보였다. 1976년 소련이 동독과 동유럽에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했다. 사거리 5000㎞로 서독은 물론 전체 서유럽을 사정권에 뒀다. 슈미트는 동유럽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가 폐기될 때까지 서유럽에도 동일한 규모의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이중 전략 카드’를 나토에 내밀었다.

1990년 12월 20일자.

나토는 슈미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4년 내에 상호 금지에 이르지 못하면 서독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했다. 환경 단체·반전 반핵 단체 등이 슈미트를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사민당 내에서도 비판이 쏟아졌지만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1982년 우파인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가 집권하고, 이듬해 나토군의 핵미사일 ‘퍼싱 2’가 서독 영토에 배치됐다. 모스크바를 7분 만에 타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소련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987년 소련은 미국과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을 체결했다. 서독은 물론 서유럽 전체가 소련의 핵 공포에서 벗어났다.

헬무트 슈미트 별세. 2015년 11월 11일자.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헬무트 슈미트 총리를 가장 좋아하는 독일 총리로 꼽았다. 김 전 총리는 2022년 콘라트 아데나워부터 앙겔라 메르켈까지 독일 총리 8명의 리더십을 분석한 책을 썼다. 김 전 총리는 슈미트가 냉전 시대 총리로서 세운 업적 외에도 퇴임 후 활동에도 주목했다.

“그는 정치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시사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공동 편집인으로 일하며 독일이나 세계의 문제를 분석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시민들도 그를 ‘독일의 현자’라 부르며 존경하였고 이슈가 생기면 우선 그의 견해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줄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 그에겐 방송 중에 흡연이 허용될 정도였습니다.”(2022년 4월 16일 자 B2면)

슈미트는 한국 통일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1990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주돈식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만나 “통일하겠다는 구호로 통일을 성취할 수는 없다. 북에 가고 싶다는 사람은 보내주라. 자신 있게 나서라”(1990년 12월 20일 자)고 조언했다.

1999년 10월 세종연구소 초청 강연에서는 “한반도 통일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중·미 관계가 21세기를 가름할 중요한 요소”(1999년 10월 16일 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