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암살범’ 안두희(1917~1996)는 79세 때인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살해됐다. 부천에서 버스기사로 일하는 박기서(당시 46세)는 이날 오전 11시 30분쯤 안두희 집에 침입해 몽둥이로 때리고 목을 졸랐다. 40㎝ 길이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고 써넣었다.
박기서는 “평소 백범 선생을 존경했다. 지난 6월 26일 백범 추모식 이후 살해를 계획했다. 후회는 안 한다”고 말했다.(1996년 10월 24일 자 1면)
안두희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습격을 당했다. 백범을 살해한 후 16년 지난 1965년 12월 22일이었다. 당시 29세 청년 곽태영은 강원도 양구 안두희 집에 들어가 마당에서 세수를 하고 있던 그의 머리를 돌로 치고 가지고 간 흉기로 얼굴과 턱을 찔렀다. 곽태영은 “10년 별러 원수를 갚았다”며 “본인으로부터 사건 당시의 정치적 배후를 자백받으려 했다”고 말했다.
가장 오랜 기간 백범 살해범 응징 활동을 한 권중희(1936~2007)는 1987년 3월 27일 서울 마포구청 앞 버스정류장에서 40㎝ 길이 몽둥이로 안두희를 때려 실신시키고 ‘반역자를 응징하며’라는 제목의 글이 적힌 종이를 남겼다. 권중희는 이후에도 안두희를 납치해 백범 암살의 배후 자백을 종용했다.
안두희는 이해 7월 21일에도 당시 27세 청년 노송구에게 각목으로 얻어맞아 중상을 입었다. 1996년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와 1987년 각목 습격을 한 노송구는 모두 행동 전후 권중희에게 전화를 걸어 거사 사실을 알렸다.
안두희는 1992년 4월 12일 인천 신흥동 집을 찾아온 권중희 등 3인에게 “당시 김창룡 방첩대장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김구 선생은 제거해야 할 인물이란 말을 듣고 암살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나 신빙성 있는 증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었다.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을 찾아가 권총으로 김구를 살해했다. 당초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몇 차례 감형을 받고 6·25전쟁 중 군에 복귀했다. 안두희는 줄곧 단독 범행을 주장했으나 이승만 정권이 배후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김구의 비서로서 암살 현장 경교장에도 있었던 선우진(1921~2009)은 2005년 8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김구 선생 암살은 이승만 대통령이 지시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건 알 수 없죠. 증거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보호 아래 이뤄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안두희는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6·25 때 풀려나서 소령으로 복직했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이건 일개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2005년 8월 12일 A6면)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안두희의 범행은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가 살아서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막은 흉거였다고 규정했다.
“한때 백범을 추종했지만 백범의 북행에 반대했던 안두희의 흉거는 우남과 백범이 살아서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우남이 배후라는 억측은 두 거인의 사후 화해마저 어렵게 만들었다.”(2019년 6월 5일 자 A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