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카네기홀은 미국 공연의 1번지로 꼽히는 공연장. 올 시즌 이 공연장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임윤찬과 첼리스트 한재민 등 출연자 명단을 온통 한국 연주자들로 채웠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한국 바이올린의 여제(女帝)’ 정경화(77)를 오는 11월 7일 무대의 주인공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지난 2017년 바흐 무반주곡으로 자신의 데뷔 50주년을 자축한 이후 정확히 8년 만에 다시 카네기홀을 밟게 된 셈이었다.
“여보세요!” 18일 서울 서촌에서 열린 간담회장에 5분 늦게 도착한 정경화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전화받는 시늉으로 웃음을 불어넣었다. 머리색은 연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보라는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라고 했다. 1967년 미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후 그는 이 전설적인 공연장을 20여 차례나 밟았다. “다 생각은 안 나지만, 레벤트리트 콩쿠르 본선만은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시 콩쿠르의 본선이 바로 카네기홀에서 열렸다. 그는 “연주는 무엇보다 음향이 중요한데 금실과 은실이 풀리듯이 바이올린의 가늘고 섬세한 소리가 끝까지 전달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연주자로서 가장 행복을 느꼈던 곳”이라고 했다.
정경화는 1970년 스물두 살에 영국 굴지의 음반사 데카와 전속 계약을 맺고 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 음반을 발표하면서 세계 음악계의 정상으로 ‘고공 비행’했다. 그가 1970년 영국 방송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3초면 이해되는 20대 정경화의 바이올린’이라는 제목으로 130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동양과 여성이라는 이중 굴레에도 고군분투했던 그에게 ‘아시아의 표범’ ‘현 위의 마녀’ 같은 별명이 따라다녔다. 정경화는 “젊었을 적에는 무대에 설 적마다 청중의 기립 박수만이 성공의 척도였다.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기립 박수가 적을 때는 ‘나는 끝났어’라는 압박도 심했다”고 했다. 천하의 베를린 필과 협연해도 스스로 성에 차지 않으면 복도에서 씩씩거리곤 했다는 건 지금도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데뷔 이후 58년에 이르는 ‘현 위의 인생’에도 우여곡절은 적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간염과 교통사고를 겪었다. 2005년에는 왼손 검지 부상으로 5년간 휴식기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사고로 다리도 다치고 회복도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모두 ‘전화위복(blessing in disguise)’”이라고 했다. 그 자신감은 무엇일까. 그는 “5년간 연주를 쉬는 동안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가르치면서 머릿속으로 바흐의 무반주곡 같은 악보들을 모두 외워 나갔다”고 했다. “악기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이 보였다”는 고백이다.
카네기홀을 비롯한 이번 북미 투어에서는 그리그·슈만·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들을 연주한다. 모두 19세기 낭만주의 작품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경화는 “바이올린의 가장 높은 경지는 노래하는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했다. 특히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라두 루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조성진 같은 피아니스트들과 즐겨 연주했던 정경화의 ‘대표곡(signature piece)’이다. 정경화는 “첫 음이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음이 끝날 때까지 인생을 느낄 수 있는 곡”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무서운 자기 확신과 집념의 대명사로 통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악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음악 공부를 할수록 나 자신은 줄어들고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거대한 바닷속에 물고기 한 마리가 헤엄치는 것 같다”고 자기 자신을 비유했다. 거꾸로 관록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 젊은 연주자 중에서는 “임윤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카네기홀 무대의 ‘예고편’이자 ‘전초전’에 해당하는 국내 리사이틀은 21일 고양아람누리, 24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26일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