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

전남 광양 출신으로 구례에 살던 선비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은 1910년 9월 10일 ‘인간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후 열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절명시는 위 구절이 가장 많이 인용되지만 모두 4수다. 그중 위 내용은 셋째 수에 나온다.

새 짐승 슬피 울고 산 바다도 찡그리는 듯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무궁화 세계가 이미 물 아래 가라앉았구나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가을밤 등불 앞에 책 덮고 옛일을 생각한다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인간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첫 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다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조선일보 1938년 12월 13일자. 매천 황현을 짧게 소개했다.

경남 진주서 발행한 신문 경남일보의 주필 장지연(1864~1921)은 이 절명시를 1910년 10월 11일 자 신문에 실었다. “매천이 남긴 시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떨어지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줄도 몰랐다”며 심정을 덧붙였다. 일제 총독부는 10일간 경남일보 정간을 명했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1914년 추모시 ‘매천 선생’을 써서 유족에게 전했다. ‘의리로써 조용히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이승의 끝나지 않은 한(恨) 저승에는 남기지 마소서/ 괴로웠던 충성 크게 위로하는 사람 절로 있으리’.

김병종의 화첩기행 '황현과 구례'. 1999년 3월 8일자.

황현은 당대 역사를 기록한 ‘민간의 사관(史官)’이었다. 벼슬한 적 없지만 스스로 사명감을 가졌다. 고종 재위 원년인 1864년부터 경술국치 1910년까지 벌어진 일들을 꼼꼼이 기록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이다. 하루하루 기록하며 국가를 사유화한 민씨 일족과 군주의 무능에 분개했다. 이제 황현의 기록은 당대를 연구하는 필수 자료가 되었다.

황현은 절명 1년 전인 1909년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서울 소공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 사진관 천연당에서였다. 주인 김규진은 큰 글씨를 잘 쓰는 서예가이자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배운 선각자였다.

채용신이 그린 황현의 초상화.

절명 이듬해인 1911년 고종의 어진(御眞)을 그렸던 화가 채용신은 황현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사진 모서리에 황현이 적은 글귀가 있었다. ‘묻노니 그대 한평생, 가슴속에 무슨 불평이 그리도 쌓였는가’. 초상화는 사진 모습대로 그리지 않았다. 사진 속 갓은 정자관(程子冠)으로, 두루마기는 깃에 검은 천을 댄 심의(深衣)로 바꿔 그렸다. 꼿꼿한 유학자의 정신을 드러냈다.

채용신이 그린 황현 초상화는 2006년 보물로 지정됐다. 2019년에는 황현의 안경을 비롯한 책장·벼루·호패 같은 생활 유물 54점이 문화재(국가유산)로 등록됐다.

황현 유품 문화재(국가유산) 되다. 2019년 7월 30일자.

황현은 절명시와 함께 남긴 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꼭 죽어 의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국가가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이가 없다.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아니한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을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