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5월 21일 밤 10시 22분, 25세 청년 찰스 린드버그(1902~1974)가 탄 1인승 비행기 ‘세인트루이스의 혼(The Spirit of St.Louis)’이 프랑스 파리 북동쪽 르부르제 비행장 활주로에 착륙했다. 비행장에 모인 10만 인파가 비행기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질렀다. 전날 오전 7시 52분 미국 뉴욕 비행장을 이륙한 린드버그는 33시간 30분간 착륙 없이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미국은 승리의 환희로 가득찼다. 신문은 린드버그 찬사 기사로 넘쳐났다. ‘인류 역사상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공적’이며 ‘부활 이후 최대 사건’이라고 칭송했다. 린드버그는 350만통 넘는 팬레터를 받았다. 린드버그는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보낸 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워싱턴에서 환영 행사를 가진 뒤 6월 13일 뉴욕에서 무개차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최소 400만명 인파가 브로드웨이에서 센트럴파크까지 늘어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군대에서 대위로 전역하고 우편물 비행사가 된 린드버그는 대령 계급을 받았다.
식민지 조선에도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 비행했다는 소식은 전해졌다.
‘아미리가 비행가 챨스 린도바 대위는 20일 오전 7시52분에 풍무(風霧)를 모(冒)하고[무릅쓰고] 풍파(風波)가 거친 북대서양(北大西洋)을 횡단하야 파리(巴里)에 도착할 3600리 무착륙 비행의 장도를 성공하였는데 동기(同機)는 파리 교외 루불제에 도착하였더라”(1927년 5월 23일자 1면)
1단 한 문장짜리 기사였다. 세계 최초 쾌거를 고작 이렇게 처리한다고? 기사는 린드버그가 수행한 대서양 횡단 비행이 세계 최초라는 언급조차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서양 횡단 비행은 앞서 숱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남짓 전 지면에도 대서양 횡단 비행 기사가 실렸다.
‘비행가 샬두·난굿세 씨는 항해가 후란소아·코린 씨를 동승시킨 후 금조 5시19분에 파리 출발하야 파리 뉴육(紐育·뉴욕) 간 무착륙 비행의 장도(壯途)에 취(就)하였는데 6시 45분에 이미 불란서 해안 상항을 지나 시간 후에는 망막한 대서양의 상공에 출하였다. 동씨(同氏)는 단숨에 애란(愛蘭·아일랜드) 하릿앗크스 급(及) 포스톤의 상공을 경(經)하야 뉴육에 도착할 터이더라.’(1927년 5월10일자 석간 1면)
뿐만 아니다. 조선일보 뉴스라이브러리에서 ‘대서양’으로 검색하면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출신 비행사들이 대서양 비행에 나섰다는 기사가 여럿 나온다.
독일 통계학자 발터 크래머와 괴츠 트렌클러가 쓴 책 ‘상식의 오류 사전’에 따르면 대서양을 최초로 논스톱 비행한 인물은 1919년 6월 영국인 존 올콕과 아서 히튼 브라운이다. 이후 유럽의 숱한 비행가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린드버그는 67번째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린드버그는 대서양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간 최초의 인물일 뿐이다. (단독 비행은 처음이라고 하는데 67번이 모두 둘 이상이었는지를 모두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최초로 비행했다는 영예를 얻게 된 이유는 뭘까. 역사 저술가 빌 브라이슨의 책 ‘여름, 1927, 미국’의 관점이 도움이 된다. 그에 따르면 1927년은 미국의 패권이 시작된 해였다.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세계 최대 도시로 떠올랐다. 미국은 세계 물자 생산량의 42%를 담당했다. 매년 영국이 가진 전체 전화기보다 많은 수가 미국 전역에 설치됐다. 러시모어 산에 위대한 대통령 4인의 얼굴을 새기는 작업이 시작된 해가 1927년이었다.
대서양을 비행기로 횡단하는 최초의 미국인이 필요했다. 미국 부호 레이먼드 오티그가 공고를 냈다. “뉴욕부터 파리까지 무착륙 비행을 성공한 첫 사람에게 2만5000달러를 주겠다.” 린드버그에 앞서 비행사 6명이 도전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다. 린드버그는 미국의 시대적 필요에 맞춤 탄생한 스타였다. 린드버그의 전기 작가 스콧 버그는 “린드버그야말로 최초의 현대적 미디어 스타”라고 했다.
미국 타임지는 린드버그 기사를 크게 쓰지 않았다가 잘못을 깨닫고 1927년 ‘올해의 인물’을 처음 시작했다. 첫 올해의 인물로 린드버그를 선정했다. 2019년 16세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 전까지 72년간 린드버그는 타임지 선정 최연소 올해의 인물이었다.
미국의 관점을 식민지 조선도 금세 받아들였다. 린드버그에게 ‘최초’ 타이틀을 부여한 것이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 석 달 후인 1927년 8월 12일자 조선일보는 미국에서 ‘린드버그 춤’이 유행한다는 사진기사를 싣고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최초’라고 설명을 달았다.
‘세계 최초의 대서양 무착륙 비행가의 영광을 얻은 린드박 대좌는 미국의 제일 행복아(幸福兒)가 되어 인기가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그리하야 린드박 춤이라는 것이 새로 생기고 린드박씨 사진을 치마에 박고 모자에 붙여 가지고 다니는 것이 한 유행이 되었다 합니다.’(1927년 8월 12일자)
‘깜짝 스타’가 된 린드버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1932년 20개월 된 아들이 납치돼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다. 나치 협력자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는 히틀러 초청으로 베를린에 가서 훈장을 받았고, 2차 대전 발발 후에는 미국의 참전 반대 운동을 벌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을 전쟁 선동자로 매도하는 연설도 했다.
린드버그가 1974년 8월 26일 사망했을 때 조선일보는 부음 기사에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47년 전 대서양 처녀 비행 린드버그 옹(翁) 별세/ 미 대전(大戰) 개입 반대 대령 계급 반납도/ 장남 유괴 이후 은둔 생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