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토녀(테스토스테론+女)’와 ‘에겐남(에스트로겐+男)’이란 신조어가 유행이다. 남성적이고 주도적인 여성과 여성적이고 섬세한 남성을 각각 지칭한다. 단순히 성격을 묘사하는 용어라기엔,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성(性) 역할에서 비껴 나간 이들에게 일종의 꼬리표를 붙이는 느낌이다. 본래 성별에서 지배적이어야 할 성호르몬이 아닌, 이성(異性)의 성호르몬이 과잉 분비되어 기대되는 성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애초에 우리가 인식하는 성 역할이란 건 원래 유동적이다. 인간 사회만 아니라 자연에서도 그렇다.
아프리카에 자생하는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은 원조 ‘테토녀’다. 암컷이 수컷보다 체격이 크고, 무리에서의 지위도 높은 데다, 사냥도 주로 무리의 고위 암컷이 수행한다. 인간 사회에서 수컷이 하는 일을 모두 암컷이 수행한다. 그럼 하이에나 수컷은 뭘 할까. 수컷은 성체가 되면 태어난 무리를 떠나 다른 무리에 합류해야 하는데, 낯선 무리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떤다. 암컷 무리의 환심을 사서 겨우 기회를 얻으면 짝짓기를 하지만, 무리에서의 서열은 갓 태어난 암컷보다도 낮다. 데릴사위 ‘에겐남’으로 평생을 보내는 셈이다.
자연에서도 수컷이라고 무조건 남성다운 성 역할을 맡는 건 아니다. 다리 사이에 달린 고환의 존재가 그런 걸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생물학적 성(sex)과 구분되는 사회적 성 역할을 호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젠더(gender)라는 표현이다.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페미니즘의 이론적 토대다. 그런데 이런 유동적인 성 역할을 호르몬의 작용으로 좁혀버리고, 성 역할을 배반하는 이들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젊은 층의 성 역할 인식이 되레 보수적으로 회귀하고 있는 징후처럼 느껴진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사회 주류를 일컫는 말은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 구분의 실익이 없어서다. ‘테토녀’와 ‘에겐남’이 호명된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소수라는 방증인데, 과거 몇 년간은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주의’가 비주류 소수를 주류 문화에 강제로 이식하는 사례가 많았다. 자연스러운 성적 매력을 뽐내는 일 자체를 죄악시하기도 했다. 그런 피로감이 쌓여 호르몬 근본주의로 회귀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테토남’ 후배에게 물으니, 그냥 그러고 노는 걸 두고 무얼 그리 심각하게 따지냐고 한다. 내가 ‘에겐남’이라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