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의 공연장 필하모니.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이 이끌었던 세계 최고 명문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가 열렸다. 이 악단의 비올라 수석인 아미하이 그로스(46)가 협연자로 나선 이날 연주회에서 한국 작곡가 신동훈(42)의 신작 비올라 협주곡 ‘실낱 태양들(Threadsuns)’이 세계 초연됐다.
쓸쓸하고 처연한 비올라의 독주에서 시작한 협주곡은 현대음악이지만 풍성한 선율적·화성적 흐름을 지니고 있었다. 23분여의 협주곡이 끝난 뒤 베를린 관객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자 지휘자 투간 소키예프는 작곡가 신동훈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 올렸다. 베를린 필의 연주를 통해서 한국 작곡가가 신작을 발표하는 것은 윤이상·진은숙 등 극히 드문 경우다. 베를린 필은 신동훈의 협주곡을 9~11일 세 차례 연주했다. 특히 마지막 날인 11일 연주회는 악단의 온라인 서비스인 ‘디지털 콘서트홀’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세계에 중계됐다. 이날 객석에는 올 시즌 베를린 필의 상주 음악가인 피아니스트 조성진(30)도 앉아 있었다. 조성진은 19일 신동훈의 실내악곡인 ‘내 그림자(My Shadow)’를 베를린에서 연주한다.
작곡가 신동훈은 10대 시절부터 카프카와 보르헤스를 즐겨 읽었고 만화책까지 탐독하는 ‘다독가(多讀家)’다. 이번 비올라 협주곡의 제목인 ‘실낱 태양들’은 20세기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1920~1970)의 시구(詩句)에서 착안했다. 2악장 형식의 이 협주곡은 마지막 두 번째 악장의 결말에 이르면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상시키는 서정성으로 가득했다. 그는 초연 직후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평소 문학 작품에서 많은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 ‘채식주의자’부터 ‘희랍어 시간’까지 소설가 한강의 작품들도 섬세하고 감각적 언어와 시적 정서 때문에 오래 전부터 좋아했다”고 말했다.
신동훈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영국 길드홀 음악·연극 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2007년부터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프로그램인 ‘아르스노바’를 통해서 당시 상임 작곡가였던 진은숙을 사사한 ‘진은숙 키드’이기도 하다. 진은숙과 신동훈 사제(師弟)의 작품들이 베를린 필을 통해서 연주되는 것도 지극히 이례적이다. 신동훈은 예전 인터뷰에서 “스승으로서 진 선생님은 누구보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분이었다. 선생님께서 작품을 들으신 뒤 ‘뭐 나쁘지 않네’라고 말씀하신 것이 내겐 최고의 칭찬이었다”고 말했다.
2019년 영국 비평가협회의 ‘젊은 작곡가상’, 2021년 ‘클라우디오 아바도 작곡상’을 잇따라 받으며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2022년에는 베를린 필이 젊은 단원 육성을 위해서 창설한 ‘카라얀 아카데미’의 초연으로 첼로 협주곡을 발표했다. 올해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비올라 협주곡을 발표하며 일종의 ‘체급 향상’을 했다. 이 협주곡은 오는 5월 29~30일 경기 필하모닉(지휘 김선욱)의 연주로 한국에서 아시아 초연될 예정이다. 신동훈은 “실은 이달까지 신작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기로 약속했는데 아직 절반밖에 쓰지 못했다. 앞으로 부지런히 마감해야 한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