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훈풍으로 얼어붙었던 꽃밭이 녹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어떤 이들은 질척거리는 물기로 예전 모습을 잃은 지저분한 흙밭을 마주할까 걱정할지 모른다. 한켠에선 생기를 되찾은 땅에 피어날 봄꽃을 그리며 환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난 28일, 밴드 린킨파크가 7년 간의 동면을 깨며 선보인 내한 공연 관객들의 반응은 후자의 환호로 가득했다. 이날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는 오후 7시 30분부터 약 2시간 동안 열린 밴드의 무대를 보고자 1만 4000명의 관객이 모여 들었다.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이미 대부분 객석이 꽉 들어찼고, 무대 막이 오를 때까지 장내에는 “린킨 파크”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근래 본 내한 공연 중에서도 손꼽히게 공연자들의 귀환을 뜨겁게 반긴 장면이었다.
열기의 배경에는 밴드가 지난 2017년부터 이어온 긴 침묵이 있다. 남성 보컬이자 밴드 주축을 맡았던 체스터 베닝턴이 그 해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밴드의 시간도 함께 멈춘 것. 남은 멤버 중 일부가 개인 공연을 갖기도 했지만 베닝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드럼 멤버 롭 버든마저 탈퇴하면서 팀 활동은 사실상 전면 중단됐다.
‘20세기 가장 성공한 밴드’로 평가 받던 화려한 영예를 뒤로했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산 침묵이었다. 1996년 6인조로 출발한 린킨파크는 2000년 첫 정식 데뷔 음반인 ‘하이브리드 띠어리(Hybrid Theory)’부터 2집 ‘메테오라(Meteora·2003)’까지 연달아 히트시켰고, 세계 1억장 판매고를 올렸다. 메탈 록과 힙합, 일렉트로닉 디제잉을 결합한 이들의 음악은 데뷔 음반명처럼 ‘하이브리드 음악 장르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단 지지를 받았다. 한국계 멤버인 조한(DJ)과 함께 2003·2007·2011년 세 차례 내한한 밴드인 만큼 한국 팬들의 아쉬움도 남달랐다.
밴드의 시간이 다시 흐른 건 이달 초 신곡 ‘디 엠프티니스 머신(The Emptiness Machine)’의 영상을 깜짝 발표하면서였다. 이 영상에서 여성 보컬 에밀리 암스트롱, 드럼 콜린 브리튼을 새롭게 영입해 6인의 팀원을 다시 정비했음을 선언한 밴드는 신곡을 선보일 첫 무대로 월드투어를 택했다. 앞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뉴욕, 독일 함부르크, 영국 런던에서 무대를 가진 뒤 아시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한국 공연에 오른 것이다.
이들의 귀환 무대들은 특히 예매 단계에서부터 ‘바뀐 보컬의 성별이 음악에 미칠 변화’에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 28일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 무대에 멤버들이 차례로 오르기 시작할 때 가장 큰 환호가 쏟아진 순간도 단연 암스트롱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린킨파크처럼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가 보컬을 교체하면서 성별까지 바꾸는 선택을 하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남성이었던 베닝턴이 목소리를 입힌 기존 발표곡들을 여성인 암스트롱의 음색에 맞추려면 음역대와 세밀한 연주 구간들까지 뜯어고쳐야 한다. 사실상 신곡을 쓰는 수준에 가까운 편곡이 될 밴드의 이번 실험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는 일부 팬들의 우려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날 360도 구조로 이뤄진 무대 구석구석을 누비며 포효하듯 27곡을 쏟아낸 암스트롱의 보컬은 그런 걱정들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그가 첫 곡 ‘섬웨어 아이 빌롱(Somewhere I belong)’부터 여성 보컬로는 잘 시도하지 않는 록 창법으로 평가되는 스크리밍(고음을 포효하듯 길게 내지르는 창법)과 그로울링(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목을 긁어 그르렁 거리는 창법)을 자유자재로 선보이자 객석에선 찢어질 듯한 떼창이 쏟아졌다. 밴드가 베닝턴과 함께 두 차례 그래미를 거머쥐었던 2002년 노래 ‘크롤링(Crawling)’, 2006년 ‘넘(Numb·래퍼 제이지와 협업)’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로 새롭게 탄생한 순간은 스탠딩석 관객들이 슬램(공연 중 몸을 부딪히는 것)과 기차놀이로 열렬히 환영했다.
밴드는 이번 월드투어에 ‘프롬 제로(Xero)’라는 이름을 붙였다. 린킨 파크의 전신 밴드 이름인 ‘제로’에서 따온 것이자 오는 11월 15일 발매할 밴드의 정규 음반명을 예고한 것이다. 여성 보컬로 얼굴을 바꾼 밴드의 새 출발이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만이 아닌, 과거의 소중한 기억들을 다시금 다져나가는 과정이기도 함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7일 아시아 지역 매체들과 가진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멤버들은 멤버들은 “기존 곡에서 (멤버들을 암시할 때마다) 쓴 ‘소년들(Boys)’이란 표현을 여성인 암스트롱에게 맞춰 어떻게 부를지 논의했다”고 했다. 밴드의 핵심 프로듀서이자 키보디스트인 마이크 시노다는 “특정한 시기에 고정된 린킨 파크가 아닌, 린킨 파크라는 밴드의 본류 자체를 느낄 수 있는 앨범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