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고전소설 ‘심청전’에서 ‘심청’이 물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면 어땠을까. 작년 미국에서 출간돼 현지에서 호평을 받고, 최근 국내 출간된 ‘바다에 빠진 소녀’(이봄)는 이 질문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저자 ‘악시 오’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2세대. 소설은 바다의 신 용왕의 신부로 점지된 아름다운 심청을 대신해, 평범한 소녀 미나가 바다에 빠지며 시작된다. 미나는 자신의 오빠와 심청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떨어지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심청을 대신해 용왕의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한번 자신의 운명을 거스른 미나는 거침이 없다. 저주에 걸려 잠든 용왕의 저주를 풀고, 바닷속에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주어진 운명에 의문을 던지는 여성들의 서사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한국계 영미권 작가들이 한국의 고전과 역사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현지에서 크게 주목받고, 국내 출간되는 사례가 잇따른다. 재일교포 가족의 서사를 다룬 소설 ‘파친코’(2017)의 작가 이민진을 시작으로, 미국의 한인 식품점 체인을 배경으로 ‘H마트에서 울다’를 쓴 미셸 자우너 등 한국계 작가들이 영미권에서 주목받았다. 그러다 최근에는 아예 배경을 한국으로 옮겨서, 심청전과 같은 고전을 각색하거나 조선·일제강점기 등을 배경으로 작품을 쓰는 추세가 생겼다. 이른바 문학을 비롯해 ‘K컬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주목도가 높아진 현상으로 풀이된다.

그래픽=이지원
그래픽=이지원

올해 초 국내 출간된 ‘사라진 소녀들의 숲’(미디어창비)은 한국에서 태어나 토론토로 이민을 간 작가 허주은의 소설. 젊은 여성들을 ‘공녀’로 명나라에 보내던 조선 초기, 제주도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을 다룬다. 소녀들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던 남성마저 사라지고, 그 딸들이 아버지의 실종 사건을 추리하며 전개된다. 허주은은 벌써 미국에서 조선을 배경으로 3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첫 소설 ‘뼈의 침묵’(2020)과 두 번째 소설 ‘사라진 소녀들의 숲’(2021)이 2년 연속 미스터리 문학상인 에드거 앨런 포 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차기작 역시 연산군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한다.

한국적 소재로 영미권에서 인기를 끄는 이들 작품의 특징은 한국적 소재를 차용하되, 그 보편성을 강조해 공감을 얻는 데에 있다. 가령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열세 명의 소녀가 잇따라 사라졌음에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당대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공녀’라는 소재는 특수하지만, 약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에 의문을 던지는 건 전 세계적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문화 영역에서 한국적 소재가 각광받는 최근의 시대적 상황과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태도 변화가 맞물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가 내는 영문 문예지 ‘아젤리아’ 편집장인 이영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과거 주눅 들어 있던 1세대 한인과 달리, 지금 미국 등에서 교육받은 한인 작가들은 탈권위적 자세를 크게 훈련받았다. 게다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한국 문화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에, 두 가지가 시너지를 내는 것”이라고 했다.

재작년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다산북스)은 1917년부터 1965년까지 한반도의 질곡진 역사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과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그려냈다. 전미 30여 매체에 소개됐고, 12국에 판권이 팔렸다. 작품을 쓴 김주혜 작가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출판사에 근무하며 인종·성별로 인해 차별을 당했지만 ‘내 자아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작품에서도 기생 ‘옥희’를 주체적 인물로 설정한 점이 돋보인다. 홍콩에 거주하는 이미리내 작가가 올해 미국 최대 출판사 하퍼콜린스를 통해 발표한 첫 소설 ‘100세 사기꾼의 여덟 가지 인생 이야기’도 마찬가지.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등 역사의 질곡 속에서 테러리스트·스파이와 같은 일들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의 삶을 그려낸다. 내년 위즈덤하우스 출판사가 국내 출간할 예정이다.

이영준 교수는 “과거 비주류였던 한국 문화가 미국 내에서 정점을 찍고 있고, 전반적으로 문화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아직은 한국의 전통·역사와 같은 소재들이 해외에서 신선하게 느껴지겠지만, 지금의 열풍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보편성 있는 담론을 제공하는 작가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