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巴人) 김동환이 주재한 대중 월간지 ‘삼천리’는 1935년 중반 ‘이광수 전집’을 낸다면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스물다섯살인 1917년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무정’을 내놓은 이래, ‘흙’ ‘유정’ ‘혁명가의 아내’ ‘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등을 잇따라 발표한 당대 최고 작가였다.근대 작가 중 첫번째 전집 발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인 춘원의 대표작을 모아 10권으로 발간한다는 계획은 세간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었다.
‘삼천리사에서는 춘원 이광수전집을 간행하기로 되야 제1회 배본 장편소설 ‘그여자의 일생’은 벌써 금일(今日)부터 발매를 개시하였다는데 이 전집(全集)은 전 십권(全十卷)으로 되야 문예작품은 물론 씨(氏)가 이십년래(二十年來) 써온 모든 정치,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저술을 전부 수집하리라 하니 춘원 저작(春園 著作)의 집대성이 이에 실현(實現)될 것이라 한다’( ‘춘원전집 간행’, 조선일보 1935년8월17일)
삼천리가 밝힌 편집위원 면면도 화려했다. 만해 한용운, 염상섭, 이태준, 김안서, 현진건, 김동인, 주요한 등 10명에 삼천리 발행인 김동환도 이름을 올렸다.
‘삼천리’는 편집후기(1935년9월호)에서 ‘「春園全集」 제1회 배본「그 女子의 一生」은 실로 열렬한 환영을 받어’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판매도 순조로웠던 것같다.
◇카프 작가 김남천의 거친 춘원 비판
당대 거물 춘원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가 스물넷 청년 문사(文士) 김남천(1911~1953)이었다. 계급 의식으로 무장한 카프(KAPF) 작가 김남천은 당시 여운형이 발행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였다. 그는 ‘이광수전집 간행의 사회적 의의’(조선중앙일보 1935년9월5일~7일)란 제목의 문예시평으로 사흘 연속 춘원을 거칠게 비판했다.
‘이순신의 백골(白骨)을 땅속에서 들추어서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속에서 찾아다가 사당간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茶山)을 하수구속에서 찬양하는 사람, 장백산맥과 한라산의 울울한 산속에서 조선 반만년 얼을 가져다가 소독수처럼 뿌리는 사람, 춘원문학과 그의 사상을 ‘민족개조론’에서 다시 찾는 사람’을 도매금으로 싸잡아 괴테, 헤겔을 추앙하는 독일 나치의 모방자로 몰아부쳤다.
‘삼천리’에 대해서도 ‘영리적인 창자를 불리기 위하여는 여하한 비열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것을 상투로 하는 자(者)’로서 ‘비양심적인 출판사’로 낙인찍었다.
김남천의 비판은 당시 논란을 일으킨 춘원의 ‘민족개조론’탓도 있지만, 전근대 역사와 문화, 전통을 ‘반동(反動)’으로 여기는 사회주의 작가 특유의 반감과 적개심이 녹아있다. ‘흥사단적인 고린 ‘사상’을 민중에게 전파하자는 심사’식의 표현에 그런 감정이 묻어있다. 조선일보 주필, 사장을 지낸 민세 안재홍(1892~1965)은 이에 대해 ‘천대되는 조선’이란 칼럼으로 반박한 바 있다.
◇신채호, 박은식, 이윤재, 이광수의 ‘이순신’
김남천은 ‘이순신의 백골을 땅속에서 들춰내 혀끝으로 핥는 사람’을 맨먼저 불러냈다. 여기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이순신은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소환’한 인물이다. 신채호가 대표적이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6월11일~10월24일)에 연재한 신채호 ‘이순신전’은 국난의 시기 ‘이순신 신드롬’에 불을 붙였다.
‘이제 이왕 일본과 대적함에 족히 우리나라 민족의 명예를 대표할 만한 거룩한 인물을 구하건대, 고대에는 두 사람이니 고구려 광개토왕이오, 둘째는 신라 태종왕이오, 근대에는세 사람이니 첫째는 김방경이오, 둘째는 정디(지)오, 셋째는 이순신이니, 모두 다섯 사람이라. 그러나 그 시대가 가깝고 그 유적이 소상하여 후인의 모범되기가 가장 좋은 이는 오직 이순신이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6월11일) 신채호는 시시각각 조선에 마수를 뻗쳐오는 일본을 대적할 민족 영웅으로 이순신을 불러낸 것이다.
박은식도 1923년 상해에서 ‘이순신전’을 펴냈다. 장도빈 ‘이순신전’(고려관,1924), 최찬식 ‘이순신실기’(박문서관, 1925),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한성도서, 1931), 이광수 ‘이순신’(문성서림, 1932) 등이 쏟아져나왔다. 이윤재, 이광수의 ‘이순신’은 신문 연재 후 출간돼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아산 충무공 유적 경매 위기로 대대적 모금운동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1931년 5월 충남 아산의 충무공 묘소와 위토(位土·문중 제사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임야)가 은행에 저당잡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동아일보는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 충무공의 묘소 위토’(5월13일자) 기사를 처음 내보냈고, 조선일보 등 한글 민간지등이 뜻을 합쳐 충무공 유적 지키기에 나섰다. 충무공유적보존회가 설립되고 대대적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현재 2400원의 잔존한 채무로 인하야 이 위인(偉人)의 위토가 오유(烏有·없어진다는 뜻)에 돌아가고 그 탄생 및 종언을 해마다 기념하는 자원이 전혀 끊이게 되는 것은 민족적 수치인 것은 물론이오 여기 있어 조선인이 민족인으로서 너무 무혈성(無血性)하고 또 무성력(無誠力)하다는 것을 여실히 표명하는 것이다’(‘이충무공의 위토와 묘지’, 조선일보 1931년5월20일) 조선일보는 사설로 빚 때문에 충무공 유적이 은행에 넘어간다는 건 ‘민족적 수치’라며 대책을 촉구했다. ‘이충무공유적보존회 有終의 미를 기함’(1931년 5월25일). ‘이충무공과 유적보존, 금후 노력이 긴절’(6월15일) 등 사태 진전에 따라 사설을 내보냈다.
신문에는 매일같이 누가 얼마를 기부했다는 성금 내역이 실렸다. 10개월간 지속된 모금운동에 개인 2만명과 단체 400곳이 참여해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이 성금으로 채무를 갚는 것은 물론, 현충사를 새로 중건해 이듬해 6월5일 전국에서 약 3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과 영정봉안식이 열렸다(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홈페이지).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충무공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민세 안재홍의 충무유적 답사
이순신은 역사 인물로 신문에 종종 등장했다. 조선일보는 1923년7월7일~10일 4차례에 걸쳐 ‘조선고금인물’ 기획의 하나로 이순신을 소개했고, 1928년 4월27일~5월4일엔 ‘조선 역사상 위인의 추억기’로 이순신을 7차례 다루며 ‘넬슨 제갈량을 능가할 才略, 조선이 낳은 최대 위인’으로 평가했다. 민세 안재홍도 1934년 이순신 장군 유적을 답사한 ‘충무유적’(1934년9월11일~28일)을 15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위당 정인보와 함께 여수 전라좌수영부터 명량대첩의 현장인 진도 울돌목(명량) 등을 돌아본 민세는 충무공을 ‘조선심(朝鮮心)의 이상적 구현자(具現者)’로 평가했다. ‘이순신 신드롬’이라 할 만한 열기가 계속됐다.
◇'인간 이순신’의 고뇌에 공감
이순신을 박정희 정부 시절의 ‘관제(官製) 영웅’쯤으로 치부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금세기 들어 더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같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 나오는 족족 성공했다. 김훈 ‘칼의 노래’ 김탁환의 ‘불멸’ 같은 소설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104부작)도 최고 시청률 32.2%를 기록했다. 1761만명이 본 국내 최대 관객동원 영화 ‘명량’(2014)은 물론 후속작 ‘한산’(2022)도 726만명이나 봤다.
김남천은 ‘이순신 신드롬’을 깎아내렸지만, 이순신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식을 줄 모른다. ‘영웅’ ‘성웅’보다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를 주목해 요즘 사람들의 공감과 연민을 이끌어낸다는 게 예전과 다른 점이다.
◇참고자료
정두희, 이순신론에 대한 역사학적 반성, 향토서울 71호, 2008,2
장경남, 이순신의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통시적 연구, 민족문학사연구 35, 2007, 12
김경남, 근대 이후 이순신 인물 서사 변화 과정의 의미 연구,한민족어문학 61,한민족어문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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