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 한옥을 배경으로 선 정희선 교수는 “할아버지가 만든 북촌 한옥을 누비면서 점점 더 그를 존경하게 됐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서울 북촌 한옥의 마당에서 고개를 올려다 보면 독특한 모양의 하늘이 보인다. 한옥 지붕과 처마 선이 하늘과 맞닿으면서 ‘ㅁ’ ‘ㄷ’ ‘△’ 같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사진작가 정희선(77) 덕성여대 명예교수(경영학)는 이 도형적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옥집에 들어가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데 기호 같은 하늘 모양이 눈에 들어왔어요.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께 말을 걸고 있더라고요. ‘이 집은 왜 작게 지으셨어요?’ ‘지붕들은 왜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소규모로 밀집된 한옥 단지를 조성하다 보니 지붕끼리 서로 가까이 붙어 있게 된 거죠. 넓은 평수 한옥이었다면 이런 모양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집 없는 조선인들을 위해 개량 한옥을 한 채라도 더 보급하려 했던 할아버지의 건축 철학이 드러나는 구도라 생각했어요.”

사진작가 정희선 덕성여대 명예교수가 찍은 북촌 한옥 사진. 지붕과 처마 선이 하늘과 맞닿으면서 'ㄷ' 자로 만들어낸 공간을 포착했다. /흰물결갤러리

정 교수는 ‘경성의 건축왕’ 정세권(1888~1965)의 손녀다. 정세권은 1920~30년대 일제의 도시 개발 정책에 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울 북촌과 익선동 등 토지를 매입하고 한옥 단지를 지은 인물이다. 당시 청계천 이남에 살던 일본인들이 조선인이 모여 살던 북촌으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빈번해지자, 몰락한 양반들의 땅과 한옥을 사들여 서민 한옥을 지었다. 정세권 선생 셋째 아들의 딸인 정 교수는 할아버지가 만든 북촌 한옥과 익선동을 포착해 15일부터 다음 달 21일까지 서울 서초구 흰물결갤러리에서 사진전을 연다. 제목은 ‘경성의 건축왕 그리고 북촌과 익선동’.

“37년간 몸담았던 대학에서 13년 전 퇴임하면서, 앞으로 사진 찍으며 살겠다고 공표했어요. 무엇을 찍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내가 하고 싶고, 해야만 할 일이 분명하게 떠올랐죠. 할아버지의 알려지지 않은 업적과 숭고한 가치관을 사진을 통해서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사진작가 정희선 교수가 할아버지인 '경성의 건축왕' 정세권이 만든 서울 북촌 한옥을 배경으로 앉아있다. /박상훈 기자

그는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검정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쓴 모습”이라며 “겉보기엔 엄숙해보이지만 집에선 굉장히 다정했던 분”이라고 했다. “6·25 전쟁이 났을 때 포탄을 맞아 할아버지 다리에 파편이 박혔어요. 어머니가 의사여서 우리 집에 머물면서 피란도 못 가고 치료를 하셨는데, 당시 4살 어린 나이였는데도 고름 냄새와 상처 치료하던 장면이 기억 납니다.”

정세권은 매년 300채의 신규 주택을 건설할 만큼 경성에서 부동산 개발 업자로 큰 성공을 거뒀다.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민세 안재홍과 평생의 동지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에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나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쌀되와 조선어학회가 완간한 ‘큰사전’, 밥공기와 수저 한 벌뿐이었다고 한다.

사진작가 정희선 교수가 찍은 서울 북촌의 하늘. /흰물결갤러리
정희선, '익선동 이음 시리즈' 중 수표로28길. 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흰물결갤러리

역사 속으로 묻혔던 정세권은 2012년 김경민 서울대 교수가 서울의 도시계획 역사를 연구하던 중 발굴해냈다. 정 교수는 “평생을 학자로, 교수로 열심히 살아오면서도 정작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르고 살았다는 게 부끄러워” 카메라를 들고 북촌을 누비기 시작했다. 2017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북촌의 도형적 하늘시리즈와 북촌 풍경 사진뿐 아니라 익선동 골목도 펼쳐보인다. “익선동은 팔을 뻗으면 양팔 끝이 벽에 닿을 정도로 골목이 좁아 포토콜라주 기법을 사용했어요.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골목마다 수천 장의 이미지를 찍은 뒤, 각 이미지 조각들을 이어 붙여서 두루마리식으로 펼쳤습니다. ‘익선동 이음 시리즈’는 지난해 영국 ‘파인아트 포토그래피 어워드’에서 입상했어요.”

정 교수는 “북촌과 익선동 사진을 찍으면서 할아버지를 점점 더 존경하게 됐다”며 “요즘 기업인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부분, 그 많은 부를 이루고도 나라와 민족, 서민을 위해 내놓았다는 게 우리 시대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