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도 작고 팔 길이도 짧고, 속도도 느리다. 선천적 청각 장애로 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남들보다 좋은 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일본 최초의 청각 장애 복서 오가사와라 게이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올해 일본 영화제를 휩쓸었다. 주연 배우 기시이 유키노(31)는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 키네마준보 시상식,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4일 한국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기시이는 “복서의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캐릭터가 몸 안에서 점점 자라나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프로 복서를 연기하기 위해 그는 3개월간 5~6kg 증량하고 일주일에 6일간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탄수화물을 줄이다 보니까 예민해지면서 시야가 좁아지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게 되더라고요. 인위적으로 연기하기보다 나 자신이 ‘게이코’가 돼 카메라 앞에 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원한 어퍼컷으로 끝나는 보통의 복싱 영화와 다르게, 프로 선수로 데뷔해 주목을 받는 순간부터 시작해 ‘그만둬야 하나’ ’계속해도 될까’ 끊임없이 고민하는 캐릭터를 그렸다. 기시이는 게이코와 닮은 점을 얘기하다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보였다. “연기를 하지 않을 땐 외톨이처럼 혼자 극장에 가서 영화만 보면서 살았어요. 영화에 대한 열정을 제 능력이 쫓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있는데, 게이코도 저처럼 외로움과 막막함을 느꼈을 거예요.”
고등학생 때 야마노테선 열차에서 캐스팅돼 2009년 데뷔했다. 주로 드라마 단역과 조연으로 출연하다 첫 주연 영화 ‘불량가족, 행복의 맛’으로 요코하마 영화제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2019년 ‘사랑이 뭘까’로 일본 아카데미 신인상을 받고, 4년 만에 최우수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다.
배역이 없던 시절, 초밥집에서 일하기 시작해 “최근까지도 틈날 때마다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제가 잘나갈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변함없는 태도로 맞이해주거든요. 제가 유명해지니까 태도가 돌변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언제 봐도 한결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꾸준히 복싱을 배우고 있다. 그는 “정신적인 강인함은 연습한다고 레벨이 오르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복싱은 육체적인 변화가 눈에 보인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했다. “게이코가 지는 장면을 연기할 땐,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는데도 ‘절대 지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게이코가 복싱을 사랑하면서 강해졌듯, 저도 영화를 사랑하면서 게이코와 함께 강해진 기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