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이 기간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연극배우 손숙, 영화인 신영균, 만화가 이현세에 이어 시인 신달자의 ‘보물’ 이야기를 들어본다.

신달자(80)는 최근 17번째 시집을 낸 현역 시인이다. 부모는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에서 ‘통달할 달’(達) 자를 이름에 붙였으나, 그와 반대로 살았다. 남편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24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동시에 쓰러진 시어머니까지 병간호를 해야 했다. 세 딸을 혼자 키우며 악착같이 살아야 했던 그 모습이 산업화 시기 어려운 삶을 살았던 모두의 인생과 닮았다.

글 모르던 어머니의 50년 전 방명록

경기도 성남시 심곡동에 집을 짓고 딸 셋과 함께 사는 시인을 자택에서 최근 만났다. 그는 50년 전 어머니가 자신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찾아와 적은 방명록을 액자에 넣어 간직해 왔다. 그에겐 “무엇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신달자 시인이 50년 전 어머니가 쓴 방명록을 품에 안고 있다. 그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남편이 쓰러져 고생하는 제 걱정을 했다”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 무덤에 찾아갔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 73년 12월 18일’. 방명록은 글이라기 보다는 그림에 가까웠다. 하나의 선을 두 번에 나눠 그었거나 받침을 쓰고 지운 흔적, 오타가 곳곳에 보였다. 글 모르던 시인의 어머니가 20일 동안 외워 쓴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에게 말로 불러줘 글을 쓰게 한 다음 베꼈다고 한다. 1910년에 태어난 시인의 어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남자만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열다섯에 장손집 며느리가 돼, 1남 6녀를 낳았다. 해방 이후에도 글공부를 못하고 집안 살림에 온 힘을 바쳤다.

해방 직후 한국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문맹 퇴치’였다. 1945년 문맹률은 약 78%. 정부는 ‘문맹 퇴치 5개년 계획’을 세워 1954년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문해교육을 실시했다. 꾸준한 노력으로 이후 문맹률은 낮아졌고, 문맹이란 말이 생소한 지금에 이르게 됐다.

“내가 글을 알면 책을 열 권도 넘게 쓸 텐데.” 시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이 말을 평생 했다고 한다. 다섯 번째 딸인 시인을 부산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낸 것은 어머니의 의지였다. 아들 못 낳아 구박받아도, 딸들은 공부하길 바랐다. “어머니는 결혼 잘하라는 말은 안 했어요. 그저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요.” 시인의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한글을 방명록에 쓰고 약 5년 뒤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였다.

시인은 “어머니는 딸들이 잘되는 걸 본 적 없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예전엔 사람이 죽으면 어머니들이 ‘속 터져서 죽었다’고 많이 말했는데, 자기 인생을 제대로 못 살고 답답했던 것 아닐까요. 어머니는 글은 못 써도 자기 감정을 잘 표현했던 사람이었어요.”

‘불조심’하며 켰던 등잔

시인의 집 곳곳에는 등잔이 흩어져 있다. 한 곳에 모으니 30여 개에 달했다. 무늬와 모양이 화려한 것부터, 심지 구멍이 두 개인 등잔까지. 그중에서 ‘불조심’이란 글씨가 쓰인 등잔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항상 ‘불조심’ 하던 때가 있었어요. 플래카드도, 책받침도 ‘불조심’이라고 적힌 것들이 많았죠.”

박재삼 시인이 선물한 백자(위 사진)와 신달자 시인의 등잔. 그는 “추웠던 제 생에 하나씩 불을 켜 주는 기분으로 20여 년 동안 모았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시인은 “6·25 전쟁 때는 양초 가격을 달라는 대로 줘야 해서, 촛불을 거의 켜지 못했다. 다른 의미의 ‘불조심’이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전쟁이 터지자 거창에 살던 시인의 가족은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등잔 하나에 의지해 가족 20여 명이 한집에 숨어 살았다. “이미 죽어 있는 사람들을 지나 뒷산으로 갔어요. 언덕 위에선 제가 살던 동네가 불에 타는 걸 봤습니다. 몇 년 지나 마을로 돌아왔고, 또 사회는 흘러가더군요. 결혼도 하고… 이렇게 험난한 전쟁 이후에도 인간에게는 사랑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쟁 이후 한국인들의 삶은 ‘불조심’과 같았다. 먹고사는 문제 속에서, 불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아끼고 조심해야 했다. 자신을 위한 삶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시인도 마찬가지. 1964년 월간 여성 신인여류문학상으로 등단했고, 1972년 현대문학에서 재등단했다.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77년, 남편이 쓰러졌다. 막내딸이 두 살이었다.

“1976년 살던 집이 90평 부지에 50평 정원이 있었는데, 260만원이었어요. 근데 남편이 병원에 들어간 첫해에만 1000만원 빚이 생겼습니다. 갚을 수 없는 돈이었죠.” 세 딸을 키우며 살기 위해 글을 쓰고 밤새워 공부했다. 소설, 에세이 등을 가리지 않고 책 수십권을 냈다. ‘백치애인’을 비롯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빚을 갚았다. 같은 기간 숙명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1990년대 말이 되자, 숨 가쁘게 달려온 시인의 눈에 등잔 하나가 들어왔다. 20여 년 전 사뒀다가 집 구석에 버려뒀던 것. 심지는 까만데, 먼지를 닦아보니 색이 뽀얬다. “등잔에 불을 켜 보니 제 자신이 추웠다는 걸 깨달았어요. 인간이었는지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었죠. 모두의 삶이 그랬을 겁니다.” 1999년 ‘등잔’이란 시는 그렇게 나왔다.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면/ 아직은 여자인 그 몸’ (‘등잔’ 일부)

박목월 “내 대표작은 오늘 밤에 쓸끼다”

시인을 버티게 한 것은 동료 문인들이었다. 그의 집에는 한국 현대사와 함께해 온 시집 수십권이 있다. 고(故) 박목월(1916~1978) 시인은 신달자 시인이 재등단할 때 가르쳤던 선생이자,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박목월 시인에게 ‘선생님 대표작이 나그네이지요’라고 물으니 ‘내 대표작은 오늘 밤에 쓸끼다’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모두 밤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누구는 대표작을 쓰고, 누구는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써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1985년 고(故) 박재삼(1933~1997) 시인에게 선물받은 백자 역시 그의 집에 40년 가까이 보관돼 있다. 한 전시회에 내놓은 것을 갖고 싶다 하니, 박 시인이 공짜로 내어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시인은 갈수록 아픈 곳이 많다.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달 동안 누워 지냈고, 최근엔 폐에 난 결절을 떼내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여든 살 시인은 지금 시대와 문학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잘살면 잘살수록 우리는 문을 닫습니다. 예전엔 전을 구워도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는데, 지금은 자기만 알고 살다 보니 속이 헛헛하고 외로울 수밖에요. 서로에게 ‘오늘 힘들었지’라고 말 한마디 건네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요. 문학이 그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