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본토, 워싱턴주(州)의 다른 이름은 ‘미국의 보르도’다. 프랑스의 대표적 와인 산지 보르도와 비슷한 위도, 여름 기온을 가졌다고 해 붙여진 이름. 캘리포니아주 다음으로 미국에서 많은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시애틀은 워싱턴 와인을 경험하기 좋은 장소다. 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떨어진 우딘빌에는 와이너리들이 늘어서 있다. 워싱턴주 전체 1000여 개 와이너리 중에서 100여 개가 이곳에 있다. 그러나 비 내리는 시애틀의 날씨를 경험한다면, 이곳에서 와인이 생산된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랜드 테이스팅’에서 한 와이너리 직원이 행사 참가자에게 와인을 따라주고 있다. 지난 6일 시작된 ‘테이스트 워싱턴’은 와인 세미나, 파티 등을 거쳐 1주일간 진행됐다. /Aubrie LeGault

정답은 워싱턴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캐스케이드 산맥에 있다. 산맥 서쪽과 달리 동쪽은 사막에 가까운 건조한 기후다. 컬럼비아 밸리를 비롯한 포도 재배 지역은 산맥 동쪽에 위치한다. 산맥이 서쪽의 습한 바람을 막아주며, 여름에 일조량이 높은 덕분이다. 강수량이 적기에 컬럼비아강에서 물을 끌어다 포도를 생산하고, 이것을 도심으로 옮겨 와인을 만드는 구조다.

지난 11일 시애틀의 축구 경기장 ‘루멘필드’의 이벤트 센터. 시애틀 관광청과 워싱턴 와인협회 주최로 1998년부터 개최된 행사 ‘테이스트 워싱턴’(Taste Washington)의 대미 ‘그랜드 테이스팅’(The Grand Tasting)이 열렸다. 미국 단일 주에서 열리는 최대 음식 행사로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로 열리지 못했다. 이날부터 이틀간 열린 그랜드 테이스팅에는 200여 개 워싱턴주 와이너리와 50여 개 음식점이 참여했다. 와인 잔 하나만 들고 다니면, 이 모든 와인과 음식을 제한 없이 맛볼 수 있었다.

와이너리마다 와인 맛의 편차가 있으나, 대체로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다. 워싱턴 와인의 대표는 ‘샤토 생 미셸’. 워싱턴주에서 처음 설립된 와이너리로, 와인 전문지 ‘와인 앤드 스피릿’이 선정한 ‘올해의 100대 와이너리’에 워싱턴주 최초로 20회 넘게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왈라왈라 밸리의 와이너리 또한 비교적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현지에서 인기가 높다.

‘그랜드 테이스팅’에 와이너리가 늘어서 있는 모습. / Jesse Breiman

리슬링 등 여러 화이트 와인과 카베르네 쇼비뇽, 멜롯 등 레드 와인이 골고루 생산되는 것이 특징이다. 소믈리에 넬슨 다킵은 “왈라왈라, 야티마를 비롯한 계곡에서 약 40년 전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의 가족과 전 세계의 인재들이 모여 놀라운 와인을 만들게 된 것”이라며 “시애틀이 진화를 멈추지 않듯, 워싱턴 와인도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또 하나의 장점은 ‘가격’이다. 적게는 10달러, 많게는 20달러 정도면 현지에서 괜찮은 수준의 워싱턴 와인을 접할 수 있다. 식사와 함께 즐기는 ‘반주용’ 와인으로도 손색이 없는 이유다.


◇긴 터널 지나, 새 단장하는 시애틀

취한 걸음으로 시애틀 도심을 돌아보니, 코로나 시기 긴 터널을 막 지나가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심과 호수의 경계에 위치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 입구. 어디선가 생선 이름을 외치고, 합창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제대로 도착한 게 맞다. 시끌벅적하면서 유쾌한 분위기로 시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파이크 플레이스 피쉬’(Pike Place Fish)다. 손님이 진열대에서 고른 생선을 안쪽의 직원에게 던진 다음, 손질 및 포장하는 전통이 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입구 /이영관 기자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1907년 소규모 어시장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 운영됐다. 연간 약 1000만 명에 달하던 관광객 수가 코로나 시기 줄어들며 상인들이 크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켓은 멈추지 않았고, 이제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고 있다.

지난 9일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인근의 아프리카 디저트점 ‘랜즈 오브 오리진’(Lands of Origin). 아프리카 출신의 사장 미라프 마모는 작년 11월 이곳에 가게를 열었다. 에티오피아식 디저트, 향신료 등을 만들어 판다. 그는 “어디에나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 수요는 있다는 생각에 (이곳에서) 시작했다”며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적당한 향신료와 단맛이 조화를 이룬 파이와 케익, 그리고 ‘코차카’라는 특제 소스를 경험해볼 수 있다.

'랜즈 오브 오리진'의 내부 모습 / 인스타그램

시애틀의 랜드마크 ‘스페이스 니들’도 새 모습을 갖췄다. 작년 4월, 개장한 지 60주년을 맞아 건물의 지붕 색을 ‘갤럭시 골드’로 다시 칠했다. 이 색은 1962년 개장했을 당시의 색이기도 하다. 스페이스 니들의 매력은 184m 높이의 바늘 모양 기둥에 우주선을 얹은 모양뿐 아니라 시애틀 전체를 다시 보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유니온 호수를 비롯한 자연과 도심의 고층 빌딩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인근의 시애틀 대관람차까지. 여러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보통 대도시의 전망대에서 보는 경관과 사뭇 다르다. 시애틀 여행의 처음이 아닌 마지막 코스로 추천한다.

워싱턴 와인과 시애틀의 도심을 오가던 여정은 ‘밥’에서 끝났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델타항공 라운지에서 한국식 찜닭, 두부조림과 쌀밥을 만난 것. 향신료가 적어 깔끔하면서도 ‘한국식’ 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맛이었다. 밥이 시애틀의 음식과 배 속에서 뒤엉키자,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