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가 2월의 소설을 추천합니다. 이달 독회 추천작은 2권. ‘남겨진 이름들’(안윤) ‘제 꿈 꾸세요’(김멜라)입니다. 심사평 전문은 chosun.com에 싣습니다.
때로는 그런 소설들과 만날 때가 있다. 등장하는 인물은 많고 주요한 사건은 불투명하게 제시되어서 가끔 스토리의 맥락을 놓치지만, 눈앞에 펼쳐져 있는 페이지의 문장을 읽어나가는 과정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그런 소설 말이다. 소설 ‘남겨진 이름들’이 바로 그런 작품에 해당한다.
한국 여성 윤에게 키르기스스탄에 체류했을 때 함께 지냈던 라리사 할머니의 부고와 함께 공책 3권이 전해진다. 할머니의 딸 나지라가 세상을 뜨면서 남긴 공책이었다. 윤은 나지라의 공책을 한국어로 번역한다. 간병의 일상, 주변인들과의 대화, 지나간 시절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 등이 뒤섞여 있는 기록이다. 나지라는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 않지만, 모눈종이 공책에 떠오르는 기억을 기록하는 일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공책에 의하면, 그는 태어나자마자 생모로부터 버려졌고, 라리사 할머니가 거두어서 딸처럼 키웠으며, 연인이 떠난 후에 혼자서 아이를 유산했고, 전신마비 환자인 타샤를 4년간 간병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샤의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지라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진단받는다.
나지라의 공책은, 단순히 일상의 감상을 기록해 둔 비망록만은 아니었다. 나를 상실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 기억이 사라져 가는 과정과 마주하고 있는 글쓰기, 언어 자체를 잃어버리는 과정에 대한 글쓰기였던 것이다. 이제는 병원 복도에서 누군가가 “나지라” 하고 불러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 이름은 나지라’로 시작하는 글을 쓴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온전한 삶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이 그 단순한 문장에서 뿜어져 나온다. “나는 나를 다시 체험하고 싶다. 나를 줍고 싶다. 펜을 쥐고 모눈 위에 첫 문장을 쓴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쓰는 순간 삶과 문학의 모든 가능성이, 마치 영원회귀를 꿈꾸는 니체의 주사위처럼, 그녀의 펜 끝으로 되돌아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따름이다. 삶과 문학의 근원적인 장면을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과 간만에 만났다. 다시 읽어도 좋을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
☞안윤
2021년 제3회 박상륭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방어가 제철’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