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다음 세 날짜에만 누군가의 탄생을 기린다. 석가탄신일, 크리스마스, 그리고 2월 11일 경록절.’ 음악을 좋아하는 마포구 홍대 주민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농담이다. 경록절은 다른 두 날짜와 달리 달력에선 기념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음악계에선 2005년부터 밴드 크라잉넛 멤버 ‘한경록’의 생일 때마다 뮤지션들이 파티와 공연을 열어온 ‘홍대 대표 명절’로 꼽혀왔다.
이 경록절이 한층 더 판을 키워 돌아왔다. 하루 짜리 생일잔치에서 ‘마포 르네상스’란 이름의 닷새 간 종합예술축제로 성장한 것. 오늘 8일부터 12일까지 음악을 비롯해 미술, 문학, 과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 아티스트 120팀이 모여 각종 공연과 전시를 선보인다. 8일 홍대 왓챠홀 개막식 공연을 시작으로 9~10일은 온라인 행사로, 11일에는 제비다방, 네스트나다, 클럽FF 등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다채로운 공연을 여는 ‘로큰롤 시티투어’, 마지막날인 14일에는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 플레이맥, 스튜디오3에서 공연과 강연, 관객 참여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화려한 출연진도 모였다. 생일잔치 주인공인 한경록이 속한 밴드 크라잉넛을 비롯해 김수철, 최백호, 이적, 잔나비, 멜로망스, 딕펑스, 곽푸른하늘, 레이지본, 몽니, 양파 등이다. 한경록이 진행자로 참여했던 마포문화재단의 인디 뮤지션 발굴프로그램 ‘인디열전’ 참여팀들도 함께 공연을 올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힘든 후배 뮤지션들이 설 무대를 마련해 준다는 취지가 더해진 공연들이다.
한경록은 최근 본지 통화에서 “반 장난으로 시작한 생일잔치가 진짜 축제가 되어 사실 쑥쓰럽기도 하고 부담도 된다”면서도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 가능한 일이다.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특히 선배 가수 최백호는 후배들을 돕는다는 취지를 듣고 “1분도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출연 요청을 수락해 주셨다”고 했다.
올해 경록절에서 가장 주목을 끈 건 예년과 달리 새로 생겨난 ‘미술’ 전시. 가요계 대선배인 김창완이 데뷔 46년간의 인생을 담아 완성한 신작 ‘자화상’ 등 음악인들의 그림이 관객을 만난다. 한경록은 “팬데믹 시기 공연이 없을 때 인문학, 특히 문화가 꽃피운 르네상스 시기와 정신없고, 좌충우돌이지만 천재가 분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푹 빠졌다. 그의 평전도 찾아 읽었다”고 했다. “전 다빈치와 달리 천재와는 거리가 멀지만.(웃음) 저 역시 좌충우돌 홍대 인디씬의 태동기를 겪어 그 둘에게 친근감을 느꼈죠.”
‘마포 르네상스’란 새 이름을 붙인 것도 “기왕 판이 커졌으니, 홍대를 넘어 마포 전체를 ‘한국의 피렌체’처럼 다양한 문화를 쉽게 접할 융합의 장으로 만드는 축제가 되길 바랐다”고 했다. 최근 경록절 공연 제작비 마련을 위해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 문구도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메디치 가문이 되어주세요.”
경록절은 시작도, 지금도 위기에 강한 축제다. 경록절은 2005년 갓 군에서 제대한 한경록이 “다함께 술 먹으며 기운을 내자”며 주변 음악인을 불러 홍대 치킨집에서 연 소소한 파티가 시작이었다. 밴드 음악을 중심으로 한 홍대 인디뮤직 씬과 음악클럽 공연들이 댄스클럽의 부흥, 음원 시장과 불법 다운로드 문제로 인한 저조한 음반 판매량 등으로 부침을 겪고 있을 때였다.
파티의 부흥은 한경록의 ‘인싸력(인사이더·주류를 이끄는 친화력)’이 주변 음악인을 끌어모으며 자연스레 이뤄졌다. “경록이가 쏜대”란 입소문에 김창완(산울림), 김수철 등 원로격 선배 뮤지션은 물론 라쎄 린드 등 해외 뮤지션까지 모여들었고, 오가는 술잔 사이 흥이 오른 분위기가 서로 마이크를 차지하려는 진풍경 공연으로 이어졌다. 한경록은 “300만원쯤 내 주머니를 털어 대접하던 그때와는 규모가 수 배로 커져 이젠 제작비 마련도 일이 되었다”며 웃었다.
지난해 팬데믹은 위기로 찾아왔다가 오히려 경록절의 성장 발판이 됐다. 공연들이 줄취소 되는 걸 보고 경록절이라도 무대가 되어주잔 생각에 온라인 공연을 기획했는데, 미국, 영국, 일본, 러시아까지 5개국 80여 팀이 모여 18시간 논스톱 온라인 공연 등을 여는 사흘짜리 축제로 성장했다. 그것이 올해 닷새짜리 경록절로 자라날 힘이 됐다.
“사실 지금도 꽤 감당하기 벅차서 얘(경록절)가 여기서 더 커지면 급격히 늙을 것 같다. 지금도 흰머리가 많이 생겼다”며 웃은 한경록이 말했다. “조용한 생일도 좋지만, 이젠 저만의 날이 아니고 도와주는 이들도 많아져 의무감이 생겼어요. 기왕 판이 벌어졌으니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함께 즐기는 축제로 잘 키워나가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