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는 요즘 ‘갈매기’ 연출 및 출연, 연극 ‘아트’ 출연, 드라마 한 편 촬영, 세종대 강의 등 네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저는 느긋하게 산 적이 없어요. 늘 닥친 일이 있었고 거기 집중하기도 바빴으니까.” /김지호 기자

이번엔 ‘연출가 이순재’다. 이 원로 배우는 지난해 ‘세계 최고령 리어왕’ 기록을 세웠건만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1934년 함북 회령 출생. 구순이 코앞인 이순재가 연극 ‘갈매기’(12월 21일부터 유니버설아트센터)를 연출한다. 사실주의의 교과서라 불리는 작품이다.

“국내에서 많이 공연했지만 재해석을 하거나 원작을 훼손하는 형태라 못마땅했어요. ‘벚꽃동산’ ‘세자매’ 등 안톤 체호프의 작품은 대사에 중요한 게 다 들어 있습니다. ‘리어왕’처럼 명대사들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어 제가 연출까지 맡았어요.”

이 연극은 작가를 꿈꾸는 트레플레프, 배우 지망생 니나 등 속절없이 뭔가를 갈망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갈매기는 도망치고 싶어도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순재는 이번에 이항나, 소유진, 오만석, 주호성, 김수로, 강성진, 고수희 등 화려한 출연진을 지휘하면서 소린 역으로 무대에도 오른다. 지난 18일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난 배우는 청력이 좀 약해졌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이순재가 연출하는 연극 '갈매기'. 이항나 소유진 오만석 주호성 김수로 강성진 이경실 고수희 등이 출연한다. 여주인공 니나를 연기할 진지희는 10여년 전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야! 이 빵꾸똥꾸야”라는 대사를 날린 악동이었다. /아크컴퍼니

–연출 경험이 있나요.

“1980년대에 연출을 몇 편 했어요. 관악극회에서 올린 연극을 제외하면 프로 무대에서 연출은 ‘가을 소나타’(1988) 이후 34년 만입니다. 여전히 ‘신인 연출가’죠(웃음).”

–오랜만에 연출하는 감회라면.

“‘갈매기’는 세종대 학생들과 제작 실습으로 여러 번 해봐서 더 분석할 건 없어요. 체호프의 명대사를 관객에게 명쾌하게 전달만 해도 성공입니다. 배우들에게도 정확한 언어 구사를 강조하고 있어요.”

–노욕(老慾) 아니냐는 시선도 있습니다만.

“‘제까짓 게 연출 해봤자지 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연출가로 돋보이려는 욕심은 없어요. 명배우 로런스 올리비에도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했지요. 텍스트가 너무 좋아 프로 배우들과 오리지널 그대로 만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연극 속 인물들은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욕망합니다.

“체호프는 삶 자체를 비극으로 봤어요. ‘갈매기’도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고, 그래서 웃음이 필요합니다. 체호프 작품에서 웃음은 마치 샴페인 거품처럼 올라왔다 금방 사라져요.”

꼼꼼히 보면 10명의 주요인물이 각자 하나씩 갈매기(갈망)를 품고 있다. 이순재는 "체호프의 명대사를 관객에게 명쾌하게 전달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이 작품의 핵심은 뭘까요.

“이 체제 아래서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회 개혁 메시지라고 봅니다. ‘죽은 갈매기’가 그 상징이에요. 리어왕이 밑바닥으로 떨어진 다음에야 백성들을 이해하고 현실에 눈을 뜨듯이 이 연극도 비슷합니다. 남녀 주인공 트레플레프와 니나의 비극적 결말은 기성세대에게 충격을 주려는 시도였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조언은 기성세대에게 하고 싶어요. 학교에서 느끼는데 옛날엔 한 달 걸리던 게 이제 보름이면 돼요. 젊은이들이 그만큼 우수해졌어요. 한마디로 종족 개량입니다. 저를 포함해 위 세대는 외침을 당하다 보니 찌들어서 살기 급급했는데, 이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분출되기 시작했어요. 그들을 오염시키지 맙시다. 밀어주되 참견하지는 말자고요. 과거 들먹이며 ‘빠꾸’ 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가야 합니다.”

–인생이 사계절이라면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엄동은 아니고 난동, 따뜻한 겨울이에요. 사실 나이로 보면 겨울 중반이고 거의 끝날 때가 됐지(웃음).”

–지나온 삶을 가끔 돌아보시나요.

“저는 과거를 느긋하게 회고해본 적이 없어요. 늘 닥친 일이 있었고 거기 집중하기도 바빴지요. 배우는 연기를 해야 생명력을 얻어요. 정년은 없으니 기억력과 몸이 감당할 때까지는 할 겁니다.”

‘인생에 더 이룰 목표가 있습니까’라는 마지막 질문은 적절하지 않았다. 이순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생 목표요? 지금 하고 있는 게 목표죠 뭐.” 눈앞의 배역을 언덕처럼 넘고 넘다 보니 어느덧 현역 최고령 배우가 돼 있더라는 말로 들렸다.

연극 '갈매기'를 연출하는 이순재는 "내가 배우 출신이라 배우들 입장을 다 이해한다. 연출이 독단적으로 끌어가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들어가는 중이다. 연습실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