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나이 와타나베’에서 자수성가한 재일 교포 야쿠자가 된 배우 서현철. “이 와타나베는 이번 영화에 목숨을 걸려고 합니다”라는 홍보 문구부터 웃음이 나온다.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일본 전통극 노(能)는 “흐린 날에는 밝게 연기하고 화창한 날에는 어둡게 연기하라”고 가르친다. 배우는 극장 밖과 정반대로 가야 관객이 더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뜻이다. 연극 ‘사나이 와타나베’(연출 황희원) 개막을 앞둔 배우 서현철(57)도 비슷한 말을 했다.

“코로나 사태를 겪은 3년간 공연장에서 ‘모처럼 밝게 웃고 즐기는 시간 되세요’ 했는데 빈말이 아니었어요. 잠깐이라도 현실을 잊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습니다. 우울한 시대에는 균형 회복 때문에라도 웃긴 연극에 더 끌리잖아요.”

그렇다. ‘사나이 와타나베’는 코미디다. 주인공 와타나베(서현철)는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 자수성가한 재일교포 야쿠자. 어릴 적에 부친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모친은 집을 떠났다. 저예산 독립 영화로 데뷔하고도 만년 백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영화감독 만춘을 와타나베가 일본으로 초청한다. 자기 삶을 액션 누아르로 만들어주면 연출료 1억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영화·드라마·연극을 종횡무진하며 ‘희극지왕(喜劇之王)’으로 불리는 서현철도 10여 년 전까지는 대학로 무명 배우였다. 첫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2010)로 전환점을 만들었지만 아픔이 있었다. “문근영의 아버지 역으로 캐스팅돼 방송국에 갔더니 높은 분이 ‘누군지도 모르는 배우를 쓰면 시청자가 집중을 못 한다. 쟤는 자르고 낯익은 배우로 바꾸라’고 하신 겁니다. 기분이 나빴고 PD가 겨우 틀어막았지만, 저한테는 일종의 백신주사가 됐어요. 선택받을 만한 배우라는 걸 증명하려고 더 열심히 연기했으니까요.”

서현철은 "코미디 연기는 호흡과 타이밍에 따라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라며 "우스운 얘기도 타이밍을 놓치면 썰렁해진다. 또 앞 사람 대사의 호흡을 받고 치느냐, 안 받고 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고 했다.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서현철도 멸시를 견디며 배우로서 자수성가를 한 것일까. “성공? 제가요?” 반문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적당한 멸시를 받았고 이제 ‘돈이 좀 되는 성공’을 했다고는 할 수 있겠네요. 하하.”

‘사나이 와타나베’의 원작자는 장항준 감독. ‘시그널’ ‘킹덤’을 쓴 작가 김은희의 남편이다. 이번 대본은 오세혁이 각색했다. 주인공을 뽑는 오디션 장면에서 마음에 드는 지원자가 없어 와타나베는 역정을 낸다. “이정재는 엄청 비싸겠지? 사나이 와타나베의 희로애락을 가장 잘 표현할 적임자는 가만,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와타나베 자신밖에 없겠군!”

이 코미디는 이렇게 와타나베가 와타나베를 연기하면서 펼쳐진다. 그에게 야쿠자는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서현철은 “엄마를 향한 복수심과 그리움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회상 장면 등으로 과거의 일들이 조금씩 흘러나온다”고 귀띔했다. “상황과 행동으로 웃길 겁니다. 1인 다역 등 연극적 장치들도 재미있어요. 다만 배우들이 어설프게 놀면 안 되고 아주 뻔뻔하게 놀아야 합니다. 시대적 아픔을 뻔뻔하고 코믹하게.”

서현철·손종학·유병훈이 와타나베를 나눠 맡는다. 서현철은 “코로나가 기세등등할 때는 배우들도 우울했다. 무대에 오르면 객석은 퐁당퐁당 거리 두기 때문에 바둑판처럼 보였다”며 “나는 영화·드라마 등 탈출구가 있었지만 대학로 배우들은 걸핏하면 공연이 멈추는 바람에 경제적 타격이 컸다”고 전했다. 그는 “일상에서 벗어나 좀 독특한 연극을 만나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관객에게 권하는 코미디”라고 했다. 공연은 오는 25일부터 대학로 플러스씨어터.

연극 '사나이 와타나베'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를 번갈아 연기하는 배우 서현철, 손종학, 유병훈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