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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로 강영숙·김태용·정용준·조해진이 선정됐다. 강영숙·김태용에 이어 정용준과 조해진의 후보작을 ‘작가의 말’을 통해 소개한다.

정용준의 후보작 ‘선릉 산책’은 아내·자식처럼 사랑한 존재를 상실한 그다음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 소설집이다. 인물들의 복잡한 사정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낸다. 심사위원회는 “간결한 문장으로 슬픔이란 감정을 누르지만, (인물들의) 삶은 심플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은 역설적으로 더욱 치밀해지고, 더욱 단단해진다”고 평했다.

조해진의 후보작 ‘완벽한 생애’는 삶의 터전에서 도망친 인물들을 통해, 완벽하지 않더라도 삶은 앞으로 나아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심사위원회는 “두렵고 비겁해서 뒤로 숨거나 도망치는 일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것도 하나의 삶의 태도로 간주하며 심지어는 긍정의 힘으로까지 뒤집어 읽으려는 소설”이라고 평했다.

‘완벽한 생애’|조해진

삶은 과오·후회가 덕지덕지 붙은 덩어리 같아

‘완벽한 생애’는 윤주와 미정, 그리고 홍콩 사람 시징이 서로의 공간에 깃들며 생애의 한 시절을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이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물결 위에서 표류하고 흔들리는 생애들, 마치 세 인물이 원래 자리를 떠나 잠시 머물기도 하고 머물렀다가 돌아가기도 하는 영등포(浦)와 홍콩(香港), 그리고 제주가 밀려왔다가 멀어지는 물결에 둘러싸여 있듯이….

사실 ‘완벽한 생애’는 단편소설로 먼저 발표했다. 단편을 중편으로 확장하게 된 계기는 오직 하나, 단편에서는 ‘윤주’의 주변 인물로만 등장하는 ‘미정’의 이야기가 나 역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미정을 형상화하며 작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신념을 따르고 싶었던 미정이 오히려 그 신념에 상처를 받은 뒤, 신념을 작게 나눈다든지 주변을 돌보는 작은 마음들을 믿게 되는 과정에 공감하기도 했다. ‘완벽한 생애’에는 홍콩의 민주화 운동과 한국의 촛불 집회 역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가령 집회에 나온 사람에게 생수 하나를 건네는 그 마음은 제주 활동가들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렌터카에 음식을 싣고 가는 한 사람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살게 하는 마음, 작지만 큰 그 마음들을 가능한 한 진심을 다해 표현하고 싶었다.

믈론 소설은 역사와 시대를 담는 그릇만은 아니다. 언제나 그 이상이다. ‘신념을 따르고 사랑에 진심일수록 상처 받고 방황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나는 ‘완벽한 생애’의 ‘작가의 말’에 썼는데, 그 문장을 다시 읽으니 생애의 필연적 과정을 모두 통과한다고 해서 그 생애가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함께 떠오른다. 생애는 매끈한 공[球] 형태가 아니라 경험과 과오와 후회가 덩어리째 덕지덕지 붙어 있는 울퉁불퉁한 도형 모양일 거라고, 그리고 그 불완전성에 이를 수밖에 없는 개개인의 고투가 역설적이게도 생애의 ‘완벽’인지 모르겠다고, 소설을 쓰면서 품었던 상념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소설은 작가가 쓸 때 한 번, 독자가 읽을 때 다시 한 번 완성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가을, 나는 다른 세 작가의 책들을 독자의 마음으로 한 번 더 완성해가려 한다. 응원을 담는다.

‘선릉 산책’|정용준

마스크 안의 혼잣말… 소설은 거기서도 태어난다

‘선릉 산책’은 표제작과 함께 ‘두부’ ‘사라지는 것들’ ‘이코’ ‘두 번째 삶’ ‘스노우’ ‘미스터 심플’이 수록된 내 세 번째 소설집이다. 일부러 그렇게 설정한 건 아니지만 소설 속 인물이 모두 어딘가를 향해 혹은 어딘가에서 벗어나 걷고 있었다. 소설을 쓴 나도 그 시절 계속 걸은 것 같다.

‘산책’은 좋은 단어다. 그 앞에 무엇을 붙여도 예쁘고 아름답다. 동네 산책. 호수 산책. 역사 산책. 강아지 산책. 하지만 산책자의 마음도 그럴까? 산책하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걸어야 하는 마음과 걸을 수밖에 없는 감정까지 그럴까?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모르겠다. 그 마음. 그 감정. 생각하고 상상해봤다. 알고 싶었고 그래서 더 많이 알게 된 것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먹먹해졌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고 들어갈수록 깊고 어두워지는 산책자의 마음. 그것은 미궁이자 수수께끼였다. 그 막막함을 문장으로 더듬더듬 헤아려보는 모든 시간이 내게는 그 자체로 소설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감추고 있는 비밀. 일상에 가려진 각자의 사정. 웃음과 무표정 너머 울음과 눈물. 마스크 안쪽에 맺힌 물방울과 혼잣말. 하지만 비극 속에 희극과 유머가 있고 캄캄한 밤 속에도 희미한 산과 밝은 별이 있듯 밤길을 걷는 산책자의 마음과 이야기에도 어떤 환함과 밝음이 있다고 믿는다. 내 방과 내 일상을 벗어난 산책자가 한 발 한 발 걸어 당도하고 싶은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내 방과 내 일상이 있는 삶이라는 것.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삶은 비슷해보이지만 아주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것.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더 나은 것. 더 밝은 것. 그 속에서 더 좋아지는 나. 산책하는 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야기엔 결말이 있어도 삶에는 결말이 없다. 포기일 수 있고 깨달음일 수 있는 미약한 흔적과 궤적을 소설로 쓰고 싶었다.

누군가 읽어주고 동감해주고 응원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고 그것에 대해 소설로 쓴 시간들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다. 좋은 기회를 얻어 내 책의 이름을 오랜만에 불러보는 마음이 참 좋다. 자신만의 언어로 각자의 방에서 쓰고 읽지만 그렇게 점점이 모인 문학의 세계에서 함께하는 이들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다. 누군가 쓰면 누군가는 반드시 읽고 밑줄을 긋는다는 믿음을 잃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