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3 봄·여름 보테가 베네타 패션쇼’ 무대에 설치된 산업 디자이너 가에타노 페세의 의자. /보테가 베네타

“반복해 말하건대, 카피(복제)의 시대는 끝났어요! 베끼는 작업(copies)은 20세기 산업화·표준화가 만들어낸 구태입니다. 오늘날은 ‘원조(origin)’의 시대입니다. 우린 모두 독창적인 존재이고, 원조와 독창성의 힘이 우리를 구제할 미래입니다. 매일 똑같은 것만 본다면 우린 죽을 거예요(if we see the same thing each day, we die)!”

여든 넘은 백발 노신사의 일갈(一喝)에 객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최근 이탈리아 밀라노의 ‘2023 봄여름 밀란 패션 위크’ 기간 중 열린 특별 아트 토크(작가와의 대화). 이탈리아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세계적 건축가이자 산업디자이너인 가에타노 페세(Pesce·83)는 마이크를 고쳐 잡고 “원조가 디자인의 미래”라고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그간 ‘현대(모던)’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복제품 생산에 대한 개념을 파괴해 왔어요. 사람들이 기계에 의존하는 건, 자기가 원하는 걸 정확하게 표현해 준 제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기성품’을 사게 되는 것이죠. 모두가 다르다는 것은 우리의 결정적인 본질입니다.”

영국의 미술 권위지 ‘아트리뷰’ 선정 미술계 파워 세계 1위(2009)에 올랐던 유명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진행한 이번 행사에서 페세는 특유의 에너지로 아트 토크를 마치 부흥회같이 뜨거운 열기로 휩싸이게 했다. 미국 유명 주간지 뉴욕매거진이 “실험적인 대담함과 열정적인 도전 정신으로 작품에 메시지를 담는 ‘선지자(prophet)’”라고 부른 것은 과언이 아니었다.

가에타노 페세. /casatigallery

그는 이번 패션 위크 기간 중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패션쇼를 위해 각각 색채와 패턴이 모두 다르게 수지(레진·resin)로 제작한 의자 400개를 선보였다. ‘코메 스타이(Come Stai·잘 지내)?’로 이름 붙은 이들 의자는 페세가 1983년 뉴욕의 유명 사립 미술대학 프랫 인스티튜트 시절 선보인 ‘프랫(pratt)’ 의자 시리즈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패션쇼’에 착안해 캔버스(유화 그리는 천)를 레진에 담가 모양을 잡는 방식으로 달리 제작했다. 400개의 도안 역시 모두 다르다.

“기계화·대량화 시대 실수는 ‘불량품’이었지만, 인간 손(手)이 중요한 시대에는 실수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이처럼 ‘나만의 것’이 존중되고 완전하게 ‘개인화’될 겁니다.” 이미 전 세계 많은 젊은이가 자기 스타일대로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고쳐 신는 것처럼 ‘나만의’ 디자인이 보편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같다는 생각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동차도 브랜드 대신 타는 사람의 이름을 따 ‘마리아’ ‘조반니’ 이런 식으로 불리게 될 거예요. 자신만의 컵, 자신만의 펜같이 모두 서로 다른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들 의자는 오는 11월 30일부터 12월 4일까지 미국에서 열리는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전시하고 이후에는 판매될 예정이다. 그의 의자는 보통 1000만원대 내외이고 일부는 수억원을 호가한다. 국내외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인 ‘뉴가십걸’이나 ‘셀링 선셋’ 같은 부유층 집안을 배경으로 한 작품엔 페세의 작품이 빠지지 않는다. 이번 패션쇼 무대 바닥 역시 작품. 레진을 이용해 마치 유화처럼 그림을 그렸다.

가에타노 페세의 1969년 대표작이자 혁신적 디자인으로 호평받은 ‘업’ 의자. /가에타노 페세 홈페이지

베네치아에서 건축을 전공한 가에타노 페세는 1969년 폴리우레탄과 저지 원단을 이용해 만든 의자 ‘업(Up)’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면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진공 포장돼 판매될 때는 납작했던 모양이 포장을 풀면서 부풀어 오르는 것이 당시엔 ‘충격’이었다고. 풍만한 여체(女體)를 연상시키는 ‘업’ 의자엔 동그란 모양의 작은 의자가 꼬리처럼 달려 보는 이에 따라 ‘탯줄’, 혹은 ‘쇠고랑’이라고 해석한다. 1980년 뉴욕의 모습을 담은 ‘뉴욕의 일몰(Tramonto a New york·1980), 창문마다 화분을 넣고 물을 재순환하는 배수구를 설치해 시대를 앞선 친환경 빌딩이라는 평가를 받는 일본 오사카의 오가닉 빌딩(1989) 등을 선보이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웅변가적인 태도와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젊은 현대미술가들이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자주 거론된다. 석촌호수에 띄운 대형 미키마우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유명 팝아티스트 카우스(KAWS)나,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과 협업한 스위스 출신 현대미술가 우르스 피셔 등이 페세 마니아를 자청한다.

그는 이번 의자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여러 개 넣었다. 단순한 의자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뜻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지금 세상요? 물음표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전체주의가 위협하는 상황에도 굴종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건,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인간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도 언젠간 느낌표 가득한 세상을 꿈꾸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