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1879~1944)과 조선일보의 인연은 각별했다. 만해는 1927년 고당 조만식의 소개로 다섯 살 아래인 조선일보 사장 계초 방응모와 가깝게 지냈다. 새해가 되면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와 셋이서 온천 여행을 다닐 만큼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고 한다.

만해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본 계초는 자금을 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울 성북동 뒷산 자락에 기와집 한 채를 지어줬다. 만해는 이 집에 ‘잃어버린 나의 본성을 찾자’는 뜻이 담긴 ‘심우장(尋牛莊)’이란 현판을 걸었다. 총독부 쪽을 바라보기 싫다는 만해의 뜻에 따라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1937년 독립운동의 거목 일송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그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만해였다. 총독부가 시신을 내주려고 하지 않자 “숨이 떨어졌는데 저대로 내버려둘 것인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계초는 일송의 장례에 필요한 자금을 내놓아 5일장과 사후 처리를 도와줬다.

만해는 1935년 4월부터 1936년 2월까지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청나라 말기 중국을 배경으로 혁명적인 주인공이 활약하는 내용이지만, 사실은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 투쟁을 고취하려 한 작품이었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신문 판매가 6000부 늘었다.

소설뿐 아니었다. ‘심우당만필(漫筆)’이라는 고정 칼럼을 조선일보에 썼던 만해는 1939년부터는 ‘삼국지’ 번역 연재를 시작해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될 때까지 계속했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의 폐간령 앞에서 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만해는 이날의 비통함을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漢詩) 속에 담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키도 쓸쓸한지고/ 망국의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벼루 앞쪽 먹물이 고이는 부분)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 4년 뒤인 1944년 6월 29일, 만해는 목전에 다가온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열반에 들었다.